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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 정벌의 실패, “감문국 대병 30人의 흔적은 간데없고, 無心한 강물위엔 다리만 우람하네""김천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첫 번째 여행 ” [감문국 이야기 13]
  •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 승인 2021.09.12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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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渡江碑 세워 감문국의 역사 복원할 가치 충분”

아포 대신리에서 바라본 감문국의 주도 개령

#유득공이 노래한 감문국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우리 민족이 세운 전국의 21개 고대국가의 도읍지를 답사하면서 지은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에서 감문국을 회고하며 노래한 詩 한 수가 전해진다.


장부인은 간 지 오래인데 들꽃은 향기롭다(獐妃一去野花香)

땅에 묻힌 낡은 비는 금효왕의 흔적(埋沒殘碑去孝王)

크게 일으킨 군사 삼십 (三十雄兵酋對發)

달팽이 뿔 위에서 천 번은 싸웠으리 (蝸牛角上鬪千場)

실학자인 유득공은 감문국의 근거지인 동부리와 서부리의 장부인릉을 비롯해 감문국의 영역을 둘러보고 주변의 배산국,어모국,아포국,주조마국,문무국과의 관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학자가 본 감문국은 달팽이 뿔같이 좁은 영토에서 벌어진 소국들의 다툼을 흥미롭게 묘사했다.

아포국의 主山 제석봉

#아포의 반란

역사서에 감문과 아포국의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아포가 배반을 해서 대군 30명을 일으켜 밤에 감천을 건너다가 물이 불어나 되돌아왔다(牙浦叛大發三十夜渡甘川水見漲而退)”는 한 줄이다.

아포국은 김천시 아포읍 제석봉 아래 제석리 일대에는 아포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고,주변에 여러기의 고분과 성곽의 흔적이 발견되고, 왕비봉(王妃峰)·관리봉(官吏峰)·삼태봉(三胎峰) 등과 같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소국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감천을 경계로 북쪽에 감문국,건너편인 남쪽에 아포국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김천을 가로지르는 감천의 폭은 중류로 내려오면서 아포와 감문국 사이는 강폭이 좁은 곳은 1~20m에 불과하다. 물이 적으면 걸어서 건너기에 충분하다.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아포국은 감문국에 순응하지 않는 나라였던 것 같다.

감문국은 감천을 유역으로하는 여러 소국의 맹주로 군림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역사서에 배반할 반(叛)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주종관계를 유지하던 아포국이 감문국에 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정벌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서의 기록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든다. 감문국이 삼한의 소국이고 삼한의 작은 나라의 가구수가 600~700호라는 기록에 의한다 해도 대병이라 칭한다면 30인은 너무작다.

300인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한 가구에서 장정 한 명이라 해도 500~600인은 차출할 수 있을터인데 30인을 대병이라 함은 역사서를 쓴 저자가 너무 인색한 것이거나 誤記가 아닌지 의심된다.

아포읍 대신리와 인접한 서원마을에서 바라본 감천과 개령

#서원리에서 바라본 감천

아포읍 대신리와 인접한 곳에 고분군이 있는데 서원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의 능선 북쪽 일대에 30기의 석곽고분이 능선을 따라 분포한다.가야계 병형손잡이 고배 파편과 낙동강 서쪽에서 출토되는 소배등이 발견되고 있다.

혹시 삼한시대 아포국의 무덤은 아니었을까?

읍락국가인 감문국이 600~700 가구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니 아포국은 많아야 100~200가구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국가나 나라라고 이름하기에 다소 어색한 마을 수준이다.

서원리와 개령사이의 강폭은 고작 10~20m에 불과하다. 하지만 강물은 물리적 거리보다 훨씬 더 깊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리감을 싹트게 만들었다.

얼마전까지 아포 사람들은 개령 사람들을 "물건너놈들"이라 불렀다.

20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서로를 적대시하던 마음의 흔적은 남아있는 것이다.

제석봉 돌탑


#제석봉의 돌탑

 제석봉에 올라보면 아포는  족히 작은 나라가 만들어질 수 있는 요건을 갖췄다.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로 감천의 풍부한 물과 넓은 금릉의 곡창지대가 눈앞에 펼쳐진다.

제석리 앞 야산에서 40기의 고분군이 발굴되었다.

아포국의 근거지인 제석리에서 미군시설인 DRMO(미 군수품 재활용 처리장)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약 40기의 고분군이 발견되어 2006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2008년 11월부터 2009년1월까지 발굴결과 5C 신라시대 유물에서 조선시대까지 많은 유물이 발견됐다. 고대부터 이 지역을 근거지로 지역지배집단이 존재한 것이 증명된 것이다.

시간을 가지고 발굴과 연구가 진행된다면 아포국의 전모가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리 감천변에서 바라본 유동산

#渡江의 흔적을 찾아서 

서원마을에서 조금 내려와 대신역 앞에서 좌측으로 차를 몰면 감천이 나온다. 지금은 우람한 현대식 다리가 놓여져 있다.

건너편에 유동산이 보이고 바로앞이 동부연당이다. 그 뒤에 감문국이야기 나라가 건설중이다.

강만 건너면 바로 감문국의 중심지다. 아포를 정벌하려던 감문국의 병사들은 어디로 강을 건너려 했던 것일까?

하류로 내려가면 강폭이 100m를 훌쩍 넘는다. 가장 강폭이 짧은 곳을 선택했으리라.

동부연당 앞이거나 좀 더 상류인 서원마을 쪽이 강을 건너기에 유리했을 것이다.

대동교에서 바라본 감천

# 도강비 (渡江碑)를 세워 새로운 역사를 써자

현재 건설중인 감문이야기나라와 동부연당 건너 감천변에 역사서에 나오는 감문국의 아포정벌 기록을 적은 渡江碑를 세운다면 감문국의 아포정벌은 역사서의 기록에서 현실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渡江碑가 세워지면 감문국이야기나라와 연계해 관광지로 만들 수도 있다. 

감천변 강가에서 2000여년 전 고대국가 중 하나인 김천의  始原인 감문국의 이야기를 귀 쫑긋하게 세우고 듣는 많은 관광객들을 상상해 보라 . 

가슴 뿌듯하지 않은가?

달팽이 뿔 같이 좁은 땅에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천 번을 싸운 우리 조상들의 흔적!

하지만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에 사라져가는 김천인의 魂을 일깨우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되살리는 것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후손에게 해 줘야 할 중요한 책무일 것이다.

개령 빗내(光川)에서 바라본 아포읍 전경

#< Storytelling>

신록이 푸르름을 더해가는 여름날 금효왕은 연당을 거닐며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연당의 蓮들도 제법 물 밖으로 둥근 이파리를 내밀었다. 주위의 물버들도 한창 잎사귀를 키워가는 중이다.

장부인은 왕의 시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벌써 며칠 밤을 뒤척이며 잠 못 이루는 왕의 심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고심의 나날을 보내던 금효왕을 점심을 물리자 장부인과 무개(無盖)장군을 은밀히 불렀다.

두 사람은 왕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했다.

드디어 왕이 입을 열었다.

“부인,이제 아포를 그대로 둘 수 없을 것 같구려”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인과 무개(無盖)장군은 그 말뜻을 이해하고 그날 밤 군사들을 불러 보았다.

정예병 30명을 뽑아 야밤에 아포국을 기습해 왕이라 칭하는 두목을 생포해 오거나 여의치 않으면 죽이기로 했다.

주위의 어모국과 배산국 문무국 주조마국은 감문의 뜻에 따르며 평화를 지켜오고 있었지만 유독 아포만은 달랐다.

 침투한 세작들의 보고에 의하면 수상한 기운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요즘은 사로(신라)와의 내통이 부쩍 늘고 사로의 배와 사람들의 움직임이 강 건너에서 목격되곤 했다.

혹여나 아포국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감문국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기에 그 불안의 씨앗을 제거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그날 밤 무개(無盖)장군은 정예 30명을 거느리고 야음을 틈타 몰래 아포국으로 잠입하기 위해 감천 강변에 모였다.

하지만 조금씩 내리던 장마가 강해지고 조마로부터의 물과 직지천의 물도 더해져 강의 범람을 걱정할 정도였다.

장부인의 보고를 들은 금효왕은 군사들의 안위를 위해 철수를 명했다.

10여년의 시간이 흐른 후 결국 아포국은  감문국을 배신하고 사로(신라)의 편에 섰다.

한동안 진굿인 빗내농악 겨루기등에 참여하는 등 감문국에 순응하는 듯 했지만 감문국과 아포국을 가르는 넓은 감천의 강물처럼 두 나라는 마음으로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서기 231년 사로(신라)의 장군 석우로는 수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아포국 감천변에 진을 쳤다.

날로 거대해지는 삼한의 제국인 신라의 편에 서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이대로 감문국의 지배에 영원히 예속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드디어 공격명령이 떨이지고 신라와 아포국의 군사들은 감천을 건너 밀물처럼 감문국으로 밀려왔다.

감문국은 신라에 저항하다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속문산에서 몰살당하고 왕과 왕비마져 죽음을 맞았지만 감문(甘文)이라는 명칭은 신라의 州로 郡이란 지명과 고려시대 왕의 君號로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감문국의 기록과 역사와 詩들은  전하지만 아포국은 아직 역사의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2000년이 흘러 이제 모두 김천인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

배시내에서 바라본 감천

자문

문재원 (향토사학자,前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이갑희(경북 향토사연구회 회장역임,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국학진흥원자문위원)


참고문헌

김천시사(김천시)

김천의 발굴유적(김천문화원)

조상의 얼찾아(문재원)

금릉빗내농악 (민속원)

대구.경북 청동기시대 문화(삼한문화재연구원)

김천의 마을과 전설(김천문화원)

디지털김천문화대전

옛 상주를 담다(상주박물관)

김천의 발굴유적(김천문화원)

감문국개령지(우준식)

경상북도 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김천역사의 뿌리 감문국

『김천의 금석문』(김천문화원, 1997) 등

 

#김천시 #감문국 #아포국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ksu38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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