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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리 고분의 주인은 누구인가?"김천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첫 번째 여행 ” [감문국 이야기 12]
  •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 승인 2021.08.1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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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리 고분/사진=황악신문

#양천리 ‘장군의 무덤’

김천시 개령면 양천리에는 '장군의 무덤'이라 불리는 오래된 석실고분이 있다. 향토사학자들은 감문국 시대의 무덤으로 보고, 사학계에서는 신라시대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

 감문국 지배층의 무덤이라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1967년 발굴 당시 금제귀고리와 토기,화살통장식, 갑옷 등이 출토되었고 유물은 경주국립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김천시 개령면 광천리 사달산(四達山) 기슭에 원룡장군수(元龍將軍水)로 불리는 우물이 있는데 전설에 진동(陳童)이란 아이가 이 물을 먹고 힘이 세어져 감문국에 큰 공을 세우고 원룡장군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양천리 고분이 원룡장군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가을이 오고 있는 감천(甘川)/사진=황악신문
감천하류/사진=황악신문

 #고분가는 길

빛을 다시 찾은 날(光復節) 양천리의 고분을 찾아나섰다. 삼한시대 감문국과 아포국을 경계짓던 감천은 이제 가을을 준비하고 있다. 하늘은 높아지고 물빛은 더욱 푸르다.

감문국 시대의 궁궐중심지로 알려진 역마고개/사진=황악신문
역마고개에 있던 감문국 궁궐의 초석/인터넷 캡처

개령면 동부리에 건설중인 ‘감문국 이야기 나라’를 지나 2000여 년전 감문국 궁궐의 중심지였던 역마고개에서 가깝다. 역마고개에는 1970년대까지 감문국 궁궐의 초석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힘들다.

양천리 고분 앞 담벼락 벽화/사진=황악신문 
양천리 고분 앞 담벼락 벽화/사진=황악신문 

 고분가는 언덕길 앞 담벼락에는 용감했던 감문국 장군의 모습을 벽화로 그려놓았다. 마치 원룡장군이 살아온듯 하다.

양천리 고분 올라가는 길/사진=황악신문

여러 번 찾았던 고분이지만 장마에 시달린 고분 가는 길은 너무나 초라했다. 좁은 길 반은 어느 할매가 고구마 농사를 짓고 있었다. 비닐까지 깔아서 제대로 밭을 만들었다.

양천리 고분 올라가는 길에 고구마가 심겨줘 있다/사진=황악신문

보수해 놓은 나무계단은 썩어서 부서진 곳이 여러군데다. 고분옆에는 운동기구가 설치되고 풀이 무성해 이곳이 김천의 시원인 감문국의 몇 안되는 가치있는 고분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고분의 여름풍경/사진=황악신문
양천리 고분 올라가는 길/사진=황악신문

나라는 광복되었지만 감문국은 여전히 역사의 망각(妄覺)이란 깊은 강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양천리 고분의 겨울전경/사진=황악신문

 #무덤의 구조와 유물

고분은 김천시 개령면 양천리 양천마을의 양천교회 북편의 구릉 일대에 있다. 뒤로는 감문산성이 위치하고 앞으로는 감천 유역의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양천리 고분입구,보수하기 전 모습이다/사진=인터넷 캡처

 내부 구조는 능선 주향과 직교하는 등고선 방향으로 장축을 둔 장방형의 판석조 구덩식 돌방무덤이다. 내부 공간 규모는 길이 2.5m, 너비 1.2m, 높이 1.2m로 판석조로 비교적 작은 편이다.

양천리고분 출토 금제귀걸이/사진=인터넷캡처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김천출토 신라시대 금제귀걸이/사진=국립박물관 제공

1976년 고분에서 금제 귀걸이, 화살통 장식, 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국립대구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박물관에도 김천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금제귀걸이가 소장되어 있는데 삼한과 신라시대 김천에도 금귀걸이를 할 정도의 강력한 세력이 존재하고 금을 채취하고 가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귀걸이는 가는 고리에 중간 수식(修飾)과 하트형 하부 수식으로 구성되었다.

출토된 토기는 뚜껑 굽다리접시 2점으로, 1점은 상부 굽구멍의 형태가 불꽃무늬인 특징이 있다. 토기 중 뚜껑 1점의 꼭지는 굽다리 도치형으로 전형적인 5세기 전반 대 신라권 토기의 모양에 속한다.

고분의 내부모습,책색의 흔적이 남아있어 벽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사진=인터넷 캡처

또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고분에 벽화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정확한 모양은 알 수 없지만 채색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무덤에 벽화를 그려넣은 민족이나 고대국가는 이집트와 고구려가 유명한데  변한계 국가인 감문국과 신라권역에서 벽화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지금은 무덤을 다시 덮어 놓았지만 기술이 더 발전해 이 벽화의 그림을 복원할 수 있다면,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와 당시의 시대상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날이 오리라 기대해본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

감문국의 백성들은 항복하면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한다고 약속했던 신라군에 의해 차별당하고 금효왕까지 죽게되자 배신에 치를 떨었다.

드디어 감문의 백성과 군사들은 노예처럼 살아가는 굴종의 삶을 거부하고 장부인과 함께 속문산으로 들어가 신라군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다 전멸했다.

그들의 넋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구름이 되어 오랜 세월동안 속문산을 뒤덮었다.

후에 사람들은 속문산을 일컬어 백운산이라 이름 했다.

백운산에서 싸운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죽은 이들의 피를 먹고 모진 목숨을 이어갔다. 사로(신라)도 더 이상 감문인들을 심하게 괴롭히진 않았다.

죽어간 이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도 허락했고, 감문국의 지배자를 뽑아 자치를 허용했다.

아버지를 잃은 어린 부용(浮溶)도 신라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지만 힘이 약해 멸망한 나라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젠가 감문국을 부흥시키리라 마음먹었다. 겉으로는 신라에 복종했지만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원통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신라는 감문국을 쳐서 감문군으로 삼았지만 아직 지방관을 파견할 만큼의 힘은 없었다.

20여년 후 어른이 된 부용(浮溶)은 감문군을 맡아 다스리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금효왕과 장부인의 능을 보수하고 힘을 길렀다.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잠못드는 날들을 보냈지만, 강해만 가는 신라의 힘을 꺽기는 역부족이었다. 수십년의 세월동안 감문국을 다시 세우려고 노력하던 부용(浮溶)은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감문국의 백성들은 그의 무덤을 감천과 찬란했던 감문국 궁궐이 내려다 보이는 양천리 산 언덕에 장사 지냈다.

임금에 준하는 무덤을 만들고  소중한 물건들도 함께 돌무덤 안에 넣었다. 

도굴을 막기 위해 큰 돌로 입구를 막았다.

세월은 덧없이 천년을 흘러 후세의 사람들은 그 무덤을 장군의 무덤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역사’란 시간이란 전쟁속에서 펼쳐지는 끊임없는 ‘기억의 전쟁’이다. 한편에선 잊기 위해서,다른 한편에선 기억하기 위해서 집요하게 몸무림친다" 

"그런데 시간은 원래 망각의 편인지라,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 속에 누구도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면 잊히기를 바라는 쪽이 결국에는 승리하고야 만다"

'임진무쌍 황진,김동진 작가의 말中

자문

문재원 (향토사학자,前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이갑희(경북 향토사연구회 회장역임,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국학진흥원자문위원)


참고문헌

김천시사(김천시)

김천의 발굴유적(김천문화원)

조상의 얼찾아(문재원)

금릉빗내농악 (민속원)

대구.경북 청동기시대 문화(삼한문화재연구원)

김천의 마을과 전설(김천문화원)

디지털김천문화대전

옛 상주를 담다(상주박물관)

김천의 발굴유적(김천문화원)

감문국개령지(우준식)

경상북도 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김천역사의 뿌리 감문국

『김천의 금석문』(김천문화원, 1997) 등

#김천시 #감문국 #취적봉#감문성지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ksu3827@naver.com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ksu38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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