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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문의 진굿,빗내농악의 화려한 부활"김천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첫 번째 여행 ” [감문국 이야기 9]
  •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 승인 2021.06.27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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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사 가는  감문의 길가에 핀 여름해바라기

#수다사 가는 길

감문국의 진굿이 부활한 선산 무을의 수다사를 찾아가는 6월 말 길가엔 여름해바라기가 화려했다.

감문국의 수도인 개령면 동부리에서 선산방향으로 직진하다 배시내에서 좌측으로 꺽어  차로 10분여를 달리면 삼거리다. 감문농협을 지나 우측고개를 넘으면 선산 무을이다.

감문면과 선산 무을은 고개하나로 경계가 나눠진다. 금효왕릉이 있는 감문면 삼성리에서 수다사까지 채 20리가 되지 않는다.

선산 무을 저수지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무을저수지 끝자락에 있는 식당에 들러서 파전과 수육,국수를 시켰다. 갈수기라 그 많던 저수지의 물은 한참 수위가 내려갔다. 

작은 시골 식당에 사람이 너무 많아 주인은 서비스의 개념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수다사 가는 길 안내표지석
수다사 일주문

식사를 마치고 식당과 가까운 연악산 수다사로 향했다. 이름 그대로 물이 많아 수다사(水多寺)다. 한때는 대단한 寺勢를 자랑하던 절집이다.

한참 골짜기를 올라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하늘로 쭉쭉 뻗은 은행나무가 반긴다.

돌계단을 올라 가면 적당한 마당을 가진 아담한 대웅전과 부속건물이 보인다. 마당 한 켠에는 300년 묵은 배롱나무가 절집의 역사를 증언한다.

수다사 마당의 300년 된 배롱나무(보호수)

절집 귀퉁이 정원에는 버찌를 닮은 열매가 빠알갛게 주렁주렁 열려있다. 하나를 따서 입에 넣으니 달짝지근하다.

대웅전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삼성각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나오니 조금 더 넓은 마당이 보인다. 절집에서 농악을 훈련할 수 있을 정도는 충분해 보인다. 언제부터 있던 공간인지는 모른다.

수다사

그 아랫편에는 족히 2~300년은 넘었을 듯한 소나무 몇 그루가 몸을 비스듬히 뉘여 있다.

 

#빗내농악의 부활 

빗내농악은 옛 감문국의 나라제사와 풍년을 기원하는 빗신제가 혼합되어 동제로 전승되었고 절굿에서 비롯되었다.

김천시 남면 부상리 출신인 정재진이라는 승려가 선산 무을 수다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이 농악을 창조했고,이것이 민가로 전승되어 본격적인 굿이 되었다고 전한다.

정재진이 꿈속에서 도깨비와 장난을 친 것을 농악가락의 모티브(motive)로 삼았고 이를 마을에 전파했다.

그래서 “정재진이 나고 매구나고 엄복동이 나고 자전거가 나고,안창남을 위해 비행기 났다”는 말이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빗내농악이 절굿에서 유래되었다는 증거는 화려한 복색 즉 머리에 쓰는 화려하고 큰 고깔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빗내농악은 절굿,무당굿,농악,군악등의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빗내농악의 구성을 보면 철저히 군악이라 할 수 있는데 마당굿,영풍굿,판안다드래기,소리굿,기러기굿 등에서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여러 가지 싸움의 기본과 훈련을 시키는 과정이 선명히 드러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전형적인 싸움굿의 형태가 등장한다.상사풀이에서는 전사자의 넋을 달래는 굿으로 마무리 된다. 여는굿,훈련굿,전투굿,닫는굿을 적절한 비율로 구성하고 있다.

정재진 스님이 고향인 남면 부상리에 농악을 전승시키면서 인근 지역에 농악이 두루 퍼졌고, 이군선에게 전수받은 빗내 오가리 농악이 시술,황새울,아포,양천,새안골 등 많은 마을로 번져 뿌리를 내리고 다시 집대성된 것이 현재의 빗내농악이다.

빗내농악과 무을농악의 상쇠 계보/금릉빗내농악 민속원 캡처

수다사에서 발생한 농악은 정재진,이군선을 통해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윤상문,우윤조,이남훈,김홍엽,한기식,손영만으로 발전되는 빗내농악과 최영일,김팔금,김칠봉,지창식,최무웅,이삼재로 계승되는 무을농악이다.

무을농악 전수관

 김천의 빗내농악과 구미의 무을농악은 한 뿌리에서 출발한 불가분의 관계다. 실제로 두 농악은 고깔의 모양을 제외하고 내용은 거의 일치한다. 

무을의 사람들이 김천장을 이용하려면 빗내를 거쳐 가야 하는 지리적 인접성도 영향이 미쳤을 것이고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무을은 감문국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천시 개령면에 있는 빗내농악전수관

수다사를 떠나 개령 동부리 방향으로 20분 정도 차를 달리면 빗내농악의 고향 빗내 즉 광천리가 나온다.마을 입구에 우람한 전통식 건물이 하나 서 있다. 바로 빗내농악전수관이다.

빗내농악전수관 표지석

하늘로 솟은 표지석은 이곳이 빗내농악의 고향임을 당당히 알리고 있다.

빗내농악전수관은 2003년 11월 빗내농악의 발상지인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 입구에 건립되어 넓은 개령들과 감천 내를 바라보고 있다. 

부지 면적 3388㎡에 지상 2층 규모의 전시실과 연습실, 숙소, 야외 공연장을 갖추고 연중 빗내농악 전승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빗내에서 바라본 개령들과 취적봉

빗내의 동네 앞으로는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다. 무을면 수다사의 주지인 정재진 스님에 의해 재창조된 농악은 무을면 오가리 출신의 2대 상쇠인 이군선을 거쳐 개령면 빗내출신의 윤상만 상쇠에게 이어져 본격적인 빗내농악으로 성장하게 된다.

5대 상쇠 이남훈에 의해 오늘날 빗내농악의 쇠가락을 정착시키고 재현해 내고,6대 상쇠 김홍엽에 이르러 1962년 제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고,김천농고에 농악반을 만드는 등 본격적으로 전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1984년 제25회 전국민속에술경연대회에서 문공부장관상을 받고 빗내농악이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경북 무형문화재 제8호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제8대 상쇠 손영만에 이르러 2011년 제 52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해 대통령상을 받는다. 여러대회에서 상을 받고 명성이 올라가면서, 2019년 무형문화제 제11-7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수다사의 老松

<storytelling>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금릉땅 남면 부상리 출신인 정재진은 선산 무을 수다사의 주지로 있었다. 수다사는 말 그대로 물이 많아 수도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무을이지만 깊은 산속이라 수행을 방해하는 이들도 없었다.

수다사는 신라 문성왕 때 절 뒷산인 미봉에 힌 연꽃이 피어 절을 짓고 연화사(淵華寺)라 이름했다.

한때는 24개의 건물을 거느리고 법화경 강론에는 수 만명의 중과 백성들이 찾기도 한 사찰이었고, 임진 왜란때는 만 명의 승병이 모이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세상은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로 민란과 연이은 수재로 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고통의 시대였다.

정재진은 요즘 꿈자리가 영 뒤숭숭했다. 벌써 여러 날이다. 금관을 쓴 임금이 나타나기도 하고, 서역의 나풀거리는 옷으로 머리를 감싼 장신의 귀부인이 나타나기도 했다.

원룡이라는 장군이 칼을 차고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기도 했다. 또 다른 많은 도깨비들이 장난을 걸어왔다,

희미하던 꿈속의 인물들은 계속 나타나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하다가 사라지곤 했다. 여러날이 지나 꿈속의 인물들은 이제 대화를 나누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머리에 왕관을 쓴 이는 자신을 금릉의 고대왕국인 감문국 금효왕이라고 했다. 천으로 머리를 감싼 여인은 장부인라고 했다. 두 사람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김산의 고대국가 감문국의 왕과 사랑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눈을 부릅 뜨고 노려보던 원룡 장군은 감문국의 맹장인데 사로(신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죽어 원한을 풀고 싶다고 했다.

정재진은 이들이 왜 꿈속에 나타나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억울하게 죽은 감문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싶다고 했다. 16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속문산성에서 죽은 많은 백성들과 군사들의 원혼은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있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조금이라도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감문의 후손들이 자신들을 잊지 않기를 소원하고 있었다.

정재진은 물었다.“소승이 무엇을 하면 되옵니까?”

금효왕의 영혼이 대답했다.“ 그대는 정신을 차리고 잘 기억하라. 내일부터 열 이틀 동안 하루에 하나의 굿을 가르쳐 줄 터이니 머리에 새기고 금릉의 후손들에게 감문국의 전통과 역사를 잊지 않도록 전라라. 마음에 새기라! 이 일이 네가 이 생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굿을 익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는 감문국의 후손인 금릉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수다사에도 절을 지을 때 쓰던 가락과 춤사위가 남아 있으니 참고하라.”

약속대로 금효왕과 장부인 원룡장군은 다음날부터 12마당의 굿의 추임과 몸짓, 짜임에 대해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사진=유뷰브캡처

첫날은 꽹과리에 맞추어 모든 풍물꾼이 춤을 추며 행진하며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가가호호 지신밟기를 하는 굿을 가르쳤다. 정재진은 골매기굿이라 이름지었다.

둘째 날은 원진을 갖춘 판을 벌려서 놀이를 준비하는 굿을 배웠다. 문굿이라 이름붙였다.

셋째 날은 마당굿으로 빠른 가락으로 상쇠와 종쇠의 가락에 따라 전 풍물꾼이 놀이훈련에 들어가는데, 상쇠와 종쇠가 서로 이동하면서 전 대원을 훈련시키는 굿이다.

사진=유뷰브캡처

넷째 날은 영풍굿으로 병사들의 훈련시키는 것으로 쇠잡이들이 원진 안에서 놀다 원의 선두로 들어가, 상쇠의 신호에 따라 앞으로도 가고 반대방향으로도 가며 또 원래위치로 돌아가는 놀이를 배웠다.

다섯째 날은 판안다드레기로 상쇠와 종쇠가 소리에 맞추어 쇠가락을 치며, 모든 풍물꾼들은 가락에 맞추어 자기 악기와 장비가 이상 없음을 과시하며 신나게 뛰어 노는 법을 배웠다.

여섯째 날은 기러기굿으로 풍물꾼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모든 풍물꾼들이 옆으로 뛰며 기러기 모양 팔을 벌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일곱째 날은 허허굿으로 상쇠가 가락을 치다가 '허허허'하며 소리를 하면 모든 풍물꾼들이 '허허허'하며 대답을 하는데, 이는 자기 장비에 이상이 없음을 알리는 것을 배웠다.

사진=유튜브캡처

여덟째 날은 쌍둥이굿으로 풍물꾼들이 큰원을 그리며 놀다가 상쇠의 신호에 따라 두명씩 짝을 지어 작은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오방진굿은 모든 풍물꾼이 다섯개의 작은 원을 만드는데 쇠가 안쪽으로 북, 장구, 소고는 바깥에서 원을 만들어 돌며 놀기도 한다.

아흐레 날은 판굿으로 풍물꾼들이 양쪽으로 갈라선 굿판 가운데서 쇠놀이, 북놀이, 장구놀이, 소고놀이 순으로 논다. 상쇠가 채굿가락을 치면 소고가 한줄로 소고놀이를 하고, 이어 잿북을 치면 소고잡이 몇 명이 중앙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빠른가락에 수박치기를 한다.

열흘 째는 영산다드레기로 가장 어려웠다. 가락과 놀이로 격렬한 전투 장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악기와 소고가 두 패로 나뉘어 밀고 당기며 전쟁을 나타내는 격렬한 놀이였다.

열 하루째는 진굿으로 상쇠와 종쇠가 두 패로 나누어 진을 치고 노는데, 이는 격전을 벌여 적을 포위섬멸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쇠가 진을 풀면 모든 풍물꾼들은 전쟁이 승리로 끝난 것을 기뻐하며 한데 어우러져 흥을 돋구며 춤을 춘다.

마지막 열 이틀째는 상사굿으로 전쟁이 끝나고 각기 헤어져 흥겨운 마음으로 각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느린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상쇠가 '얼룰루 상사듸야'를 선창하면 모든 풍물꾼들이 뒷소리를 따라하며 돌아간다.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르는 의식을 끝으로 모든 굿은 끝났다.

사진=유튜브캡처

열 이틀 동안의 가르침이 끝나자 감문국의 금효왕과 총희인 장부인, 원룡장군은 정재진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동안 고생이 많았소. 부디 우리의 부탁을 기억하고 잘 전해 주시오. 대신 그대의 이름이 영원히 역사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해 주겠소. 감문국의 땅 빗내라는 곳에 가면 그대를 도울 사람들이 있을 것이오. 정말 고맙소”

수다사의 승려 정재진은 같은 절의 승려 이군선과 무을의 오가동 백성들을 불러 꿈속에서 가르침을 받은 굿판과 절에서 전해오던 놀이를 섞어 익히기 시작했다.

굿판이 완성되자 빗내마을의 주민들을 인솔해 본격적인 빗내풍물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1600년동안 잊혀졌던 빗내농악은 다시 부활했다.

빗내농악은 1984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고,문화재청으로부터 2019년 9월2일에 국가무형문화재 보유 단체(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로 인정받아 인정서를 문화재청장으로부터 교부받았다.

김천의 유일한 무형문화재인 빗내농악은 2000년전 감문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감문국이 사로국에 서기 231년에 패망한 뒤 소실되었다가 금릉군 남면 부상리 출신 수다사 승려 정재진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굿이란 특별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감문국의 전쟁에서 유래됐다.

기나긴 세월동안 잊혀졌다 고대 감문국 출신 승려에 의해 복원되고 다시 많은 민초들에 의해 재창조되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농악으로 최고봉에 선 빗내농악은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빈약한 지방재정에도 불구하고 발빠르게 우람한 빗내농악전수관을 세운 김천시의 선견지명이 함께 이룬 결과물이다.

이제 빗내농악을 후손에게 더 발전시켜 계승시키는 것은 지금을 사는 金泉人들의 몫이다.


자문

문재원 (향토사학자,前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이갑희(경북 향토사연구회 회장역임,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국학진흥원자문위원)

참고문헌

김천시사(김천시)

김천의 발굴유적(김천문화원)

조상의 얼찾아(문재원)

금릉빗내농악 (민속원)

대구.경북 청동기시대 문화(삼한문화재연구원)

김천의 마을과 전설(김천문화원)

디지털김천문화대전

옛 상주를 담다(상주박물관)

김천의 발굴유적(김천문화원)

감문국개령지(우준식)

경상북도 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김천역사의 뿌리 감문국

『김천의 금석문』(김천문화원, 1997) 등

#김천황악신문 #빗내농악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ksu38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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