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뉴스 기획특집
물의 나라 甘文國 왕비 ‘장부인(獐婦人)’ ...곰고개(熊峴)에 잠들다“김천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첫 번째 여행 ” [감문국 이야기 5]
  •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 승인 2021.04.08 22:09
  • 댓글 0
포도밭으로 변한 장부인릉/2020년 사진

장릉은 현의 서쪽 웅현리에 있는데 세상에서 말하길 감문국 시대 장부인의 능이라고 한다(獐陵在縣西熊峴里俗稱甘文國時獐婦人陵)- 『동국여지승람』

장릉은 개령면 서부동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해오기를 감문국시대 장부인릉이라고 한다(獐陵在開寧面西部洞俗傳甘文國時獐婦人陵)- 『조선환여승람』

장릉은 군서부 웅현리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감문국시대 장부인릉이라 한다(獐陵在郡西熊縣里俗傳甘文國時獐婦人陵)- 『교남지』

일명 장부인릉이라고 하고 일명은 장희릉(獐姬陵)이라고 하나니 현재 서부동 서편 웅현에 있으니 감문국 때의 어너 임금님의 총희(寵姬)였든 것이다- 『감문국개령지』

경상도좌우주군(慶尙道左右州郡) 총도(總圖) 금산, 지례, 개령부분도에는 감문산을 중심으로 二十里 甘文王 金孝王陵” 또 좌측으로 “七里 甘文王妃獐夫人陵 獐陵-『동여비고』

서부리 3층석탑

#장부인릉 찾아가는 길

김천에서 선산방향으로 10분정도 차를 몰면 개령면 서부리가 나온다. 서부리로 들어가 좌측으로 돌면 서부리 3층석탑 안내문이 붙어 있다. 조금 올라가면 포도밭 옆으로 올라가는 샛길을 만날 수 있다. 다시 우측으로 10미터를 가면 통일신라시대의 거대한 석탑이 우뚝 서 있다.

새로 만들어진 시설하우스 /안에 장부인릉이 있었다.
2020년 여름의 포도밭

석탑에서 산쪽을 바라보면 포도나무 시설하우스가 있다. 그 안에 바로 장부인릉이 있던 자리다. 

장부인릉이 있던 자리에 돌멩이가 놓여져 있다
이번 봄에 밭이 정리되어 돌멩이마져 사라졌다.

지금까지 장부인릉을 5~6회 탐사 하면서 포도넝쿨 아래 돌 하나만 달랑 놓여 바로 그 자리가 장부인의 능이라 알려주었는데 이제 그마저도 없어져 버렸다. 돌이 하나 놓인 것도 포도밭 주인의 배려 덕분이다.

장부인릉이라 오해받은 진주강씨의 사묘

예전에는 포도밭 아래 진주강씨 집안의 무덤을 장부인릉이라 오해한 적도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 개령면 서부리 사자사(獅子寺)터 폐탑에서 북쪽 30m에 감문국의 장부인능이 있다고 알려져 왔다. 감문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능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삼성리의 금효왕릉(金孝王陵)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서부리의 장부인릉(獐夫人陵)이다.

금릉군지에는 “일제 강점기에 도굴되어 그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봉분의 하단 흔적으로 10m정도의 대형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현장에서 덮개돌과 자갈돌을 채집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2년 전 만난 포도밭 주인인 노인은 약 50년 전쯤에 가시덩굴로 덮힌 무덤을 개간하면서 돌들을 포도밭 구렁으로 치웠고 지금은 땅속에 묻혀 있다고 했다. 지금 이곳은 진주강씨 종중의 땅으로 사유지다.
 

#장부인은 노루부인?

향토지 곳곳에 기록이 등장하는 장릉은 구전으로 감문국 시대의 어느 왕비 무덤으로 알려져 왔으나, 금효왕 어머니의 능(陵)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마지막 감문국의 왕인 금효왕의 총희(寵姬)라고도 전해온다.

장부인(獐夫人)의 존재에 대해서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노로(爐盧)는 쇠를 다루는 화로(火爐)를 가리키는 것으로 감문국 시대는 원삼국 시대, 즉 철기 시대였으므로 철을 다루는 계층인 지배자를 상징하며 노로부인의 노로를 동물인 노루 장[獐]으로 잘못 표기해 장부인(獐夫人)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복원 전 사자사 석탑의 모습

#사자사 석탑의 슬픈 역사

사자사 석탑은 호두산에서 신룡리 방면으로 뻗던 야산이 뱀의 형상인 사산(蛇山)과 연결되는데 그 아래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김천 최대 규모의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이 있던 곳은 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자사(獅子寺)가 있던 절터였는데, 1473년(성종 4) 개령현감 정난원(鄭蘭元)이 절을 허물고 그 자재로 개령향교를 세웠다. 당시 사자사의 목재와 석물들은 대부분 향교 건축에 쓰였고 너무 커서 용도를 찾지 못한 몇 개의 석탑 잔해들만 버려져 천년의 절터를 지키다 지난 1997년 현재모습으로 복원됐다.

#장부인릉의 발굴

일제 강점기인 1917년 지표 조사 당시 내부가 노출된 구덩식 돌방무덤 1기와 장릉(獐陵) 혹은 장부인릉(獐夫人陵)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분에 대한 지표 조사 기록이 있다.

"구덩식 돌방무덤은 현재 유실되었는데, 당시에는 서부리마을에서 김천 시내로 나갈 수 있는 서쪽의 언덕길에 있었다. 장릉은 현재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북서북 쪽으로 약 150m 떨어져 있으며 천정석 윗면의 평면돌만 남아 있다"

1917년 지표 조사 때 확인된 고분은 구덩식 돌방무덤으로 당시의 간략한 도면과 설명만 남아 있다.

 "유입된 토사가 쌓여 바닥 상태는 알 수 없으나 벽체는 벽돌 모양의 비교적 균등한 크기와 모양으로 다듬은 할석으로 축조하였다고 한다. 벽석 표면에는 회미장이 되어 있었으며, 현실과 연도의 천정부는 판석으로 덮었다. 현실의 계측치는 전후 방향 길이 1.48m, 좌우 방향 너비 3.33m, 높이 1.39m이다"

삼국 시대 굴식 석실[橫穴式石室]의 구조 형태에서 길이에 비해 너비가 두 배 이상인 횡장방형(橫長方形) 현실, 연도 천정석 윗면에 바로 현실 천정석을 올린 축조 상태, 그리고 수직 벽체의 3가지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 詩보다 슬픈 현실

사랑하는 장희(獐姬)가 어이가단 말가

한번 가면 몯올 길을 어이 가단 말가

궁궐(宮闕)에 계옵신 임금님의 옷깃에

구슬같은 눈물 떠러트리고

천백년千百年) 잘 있으라 축원(祝願) 드리였거든

어인일가 오날의 메여진 무덤 우에

무심(無心)한 까마귀 앉었다 날너더라

 

감문국개령지를 쓴 우준식은 詩에서 장부인을 장희(獐姬)라 칭했다. 감문국 임금의 왕비에 버금가는 직위의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본 것이다.

장부인이 감문국의 마지막 王인 금효왕의  사랑하던 여인이라면 약 30리(12km) 떨어진 곳에 그의 연인인 왕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걸어서 가기엔 먼 거리지만 영혼이 만나기엔 찰나(刹那)의 순간이다. 시설하우스의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이제 꿈같은 삶의 아픈 기억은 잊어버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 살아서 손잡고 거닐던 동부연당을  다시 찾으며 영원히 행복하길 기도했다.

화려한 복사꽃

오늘은 詩속의 무심한 까마귀는 없고 참새들이 반겨 주었다.무덤에 있던 포도 시설하우스 아래에는 분홍색 桃花 한 그루가  화사하게 피어있다.
 

마치 장부인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복사꽃 화려한 나무에 약속했다.

“언제일지 기약할 수 없지만, 반드시 화려하게 부활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꼭 그리 될 수 있도록,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이름을 걸고 드리는 마음의 언약이다.
 

이제 다시 능이 있던 자리에 가까이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포도가 자라고 시설하우스의 철문이 잠기면 도둑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다.

동부연당의 싱그러운 모습
김종직 부자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왕버들


#강물에 비친 기억(스토리텔링 storytelling)

동부연당에 들렀다. 예전에는 감천의 물이 드나들던 감문국 궁궐의 연못이다. 

김종직 부자가 심었다는 왕버들의 잎새들이 물을 먹어 싱그럽다. 이제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잠시 연당을 거닐며 연못의 물을 바라보았다.

2000년 전의 기억들이 물을 거울삼아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물을 관장하던 신들이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땅,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땅을 찾고 또 찾아 다니다 감천의 물결을 따라 개령 동부리에 와 이곳을 지상낙원의 왕국을 건설할 땅으로 정했다.

나라를 세우고 물의 나라란 의미로 甘文國이라 이름했다.

감문국의 백성들은 水神(물의 신)들의 가호아래 태평한 세월을 보냈다. 30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배고프면 감천의 고기를 잡아 먹고, 곡식을 기르며 천상의 신들처럼 살았다. 사소한 일들을 제외하고 마찰은 없었고 전쟁도 없었다.

많은 왕들이 세워졌다 사라져 갔지만 왕과 백성들은 서로 아끼며 사랑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닌 서로 보듬는 사이였다. 의식주를 제외하곤 수행에 힘써 물의 신들을 존경하고 더 높은 경지로 성장하길 바랬다.

하지만 평화로운 날들이 영원하진 못했다. 세상은 영역을 넓히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기운이 팽배해 지고 있었다.

서기 231년 동부연당의 맑은 물가에서 한 여인이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온 수만리 바다 건너 남쪽의 고향을 추억하며 슬프게 흐느꼈다.

어려서 저 바다 남쪽에서 상인의 배를 타고 중국 대륙을 거쳐 다시 낙동강을 따라 감천까지 흘러 들어온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따듯한 고향이 너무 그리웠다.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이국인이라 감문국의 왕과 결혼할 수 없었지만 딸도 하나 낳아 예쁘게 자랐다.하지만 백성을 지극히도 사랑하는 왕은 이미 사로(신라)에 항복한 터였다.

강력한 군사와 철제무기 앞에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항복 외에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사로(신라)의 백성을 보호해 주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감문국을 점령한 사로국(신라)의 대장군 석우로는 난폭했고, 저항하던 금효왕은 얼마 전 죽임을 당했다.

살아서 사랑하는 사람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금효왕은 먼길을 떠나고 이제 홀로 남았다.

한 많은 이국 출신의 여인이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싸우다 죽는 일뿐..."

나라는 사라졌고 백성들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다.

싸움의 승산은 전혀 없다.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백성들과 공주는 어찌할꼬?”

그녀는 하염없이 북받치는 설움에 어깨를 들썩이며, 사랑하던 이들과 거닐던 이 동부연당에  마지막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이제 돌아서면 전쟁이다."

" 생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궁궐이다 "여인은 이빨을 깨물며 일어섰다.

그녀는 남은 군사들과 싸움에 자원한 백성들을 데리고 속문산성으로 들어갔다.

치열한 며칠의 전투가 끝났다.

속문산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던 감문의 백성과 군사들은 단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약속을 배신한 사로(신라)를 향한 원한은 맺혀  하늘로 올라 구름이 되었다.

 속문산은 백운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살아남은 이들이 그들의 주검을 거두어 묻었다.

여인의 시신은 사랑하는 이의 곁에 가지 못하고 30리 떨어진 서부리 곰고개(熊峴)에 묻혔다.

후일 사람들은 그녀의 무덤을 장부인릉(獐婦人陵) 혹은 장릉(獐陵)이라 불렀다.

장부인릉 근처에서 발견한 자기 파편

삶에 정답은 없다.

영혼의 성장을 목적으로 평화를 원하다 죽음을 맞이한 김천의 뿌리인 감문국의 선조들처럼 살 것인가?

물질과 욕망이 뒤섞인 세상에서 영적인 삶과 현실을 조화롭게 엮어 패배하지 않는 역사의 强者가 될 것인지...

결과적으로 가슴시린 패망의 역사로 기록된 감문국의 영혼들은 오늘을 사는 후손인 우리에게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금릉인=김천인들의 선택은 무엇일까?

<자문 >

문재원 (향토사학자,前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이갑희(경북 향토사연구회 회장역임,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국학진흥원자문위원)

<참고문헌>

김천시사(김천시)

김천의 발굴유적(김천문화원)

조상의 얼찾아(문재원)

금릉빗내농악 (민속원)

대구.경북 청동기시대 문화(삼한문화재연구원)

김천의 마을과 전설(김천문화원)

디지털김천문화대전

옛 상주를 담다(상주박물관)

김천의 발굴유적(김천문화원)

감문국개령지(우준식)

경상북도 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김천역사의 뿌리 감문국 등

# 황악신문 #장부인릉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ksu3827@naver.com

<저작권자 © 김천황악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오늘의 주요뉴스
대경 중기청, 대구경북 스타트업 페스티벌 참여기업 모집
대경 중기청, 대구경북 스타트업 페스티벌 참여기업 모집
102회 전국체전 무관중·고등부만 개최…28일 장소 등 발표
102회 전국체전 무관중·고등부만 개최…28일 장소 등 발표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