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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문국의 성립과 멸망“김천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첫 번째 여행 ” [감문국 이야기3]
  •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 승인 2021.03.21 11:58
  • 댓글 1
봄이 오고 있는 동부연당(감문국 궁궐 연못)

#김천의 뿌리... 甘川의 나라,감문국!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인구 3~4천명의 읍락국가라면 아득한 옛날 얘기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눈을 세계로 돌려 동시대의 역사를 대입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중국은 기원 전 206년 유방이 항우와의 대결에서 승리해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韓나라를 세웠다.

감문국이 멸망할 즈음 중국대륙은 혼란기였다. 한나라가 분열로 쇠약해지고 황건적과 군웅이 할거하던 격랑(激浪)의 시기다. 감문국이 망하기 10년 전 서기 220년을 즈음해서 우리에게 익숙한 삼국지의 위,촉,오 세나라가 건국됐다.

중국대륙에서 조조와 유비,손권이 치열한 전쟁을 치루던 시기 감문국도 신라의 침략에 대비해 산성을 정비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을 것이다.

2021년 2월 27일 폼페이에서 원형 상태로 발견 된 2000년 전 전차/인터넷 캡처

최근 이탈리아의 고대 도시 폼페이에서 화산푹발에 묻힌 2000년 전 전차가 발견됐다. 철제 부속품과 청동과 주석으로 장식으로 있었다. 얼핏 보면 최신 전차와 흡사하다.

2000여년 전 시대는 역사책의 박제화 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관심을 가지면 우리 가까이 실감나게 다가올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감문국의 성립

기원 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위만조선이 망하고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됐다. 우리민족이 세운 최초이자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고조선의 찬란한 역사가 종지부를 찍었다. 

주류 사학자들은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선진 문물을 가진 유민들이 한반도의 남쪽으로 내려와 정치결사체인 초기국가 형태의 소국을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위만조선이 멸망하기 전 기원전 3세기 이전까지 이미 한반도 남부에는 청동기와 철기문화에 바탕을 둔 삼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기원전 3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중국 대륙의 진나라의 통일과 멸망, 한의 재통일,고조선과 위만조선의 교체 등으로 보다 선진화된 문명을 가진 유민들이 한반도 이남으로 이주해 삼한이 형성되었고, 위만 조선 멸망이후 남하한 유민들이 토착민에게 문화적 충격을 가해 읍락국가의 형성을 촉진시켰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이미 김천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유적들이 증명하듯 삼한시대 훨씬 이전부터 감천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사람들이 분포해 살아왔기 때문이다.

감천 상류 지역에 산발적으로 살고 있던 토착민들이 농사짓기 유리한 평야지대인 개령과 감문지역으로 이동해 주변의 읍락을 흡수 통합해 감문국이라는 소국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감문국의 규모

중국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송(宋)의 범엽(范曄)이 저술한 <후한서>와 3세기 후반에 기술된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마한에는 54국,진한 12국,변한 12국 ,모두 78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규모에 대해서는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진한과 변한의 규모에 대해  큰 것은 4~5천가,작은 것은 6~7백가로 모두 4~5만여호에 달하였다고 적혀 있다.

중국의 사서로 추정되는 <東史>에 “아포가 반란을 일으켜 대병 30명을 보낸 강을 건너려 했으나 물이 불어나 되돌아왔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감문국의 규모는 600~700가구, 인구는 4000명 내외로 현재 면 2개 정도의 크기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東史의 대병 30명이란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의문이다.인구가 4000명 내외의 국력에 대병이라 함은 최소한 500~1000명은 되어야 대병이라 하지 않을까? 산성을 쌓고 궁궐을 만들 정도라면 장정이 어느정도는 있어야 될터인데 너무 감문국의 규모를 작게 만드는 기록이라 여겨진다.

감문국의 영토는 현재 김천시 개령면과 감문면이 주무대이지만 최근에 개령 동쪽 12km지점에 있는 선산지역까지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실제로 개령과 감문은 선산과 닿아있다. 감문면의  고개를 넘으면 선산 무을이다. 빗내 농악이 탄생한 수다사가 가깝다. 예전 선비들은 김천 개령의 우태산(옛 복우산)이티재를 넘어 무을면 안곡리로 괴나리 봇짐을 메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다녔다. 

길은 오랜 인간의 역사와 발길을 담고 있다. 선산과 개령 감문은 깊은 역사적 관련성을 지니고 있어 충분히 감문국의 영향력이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군에게 끝까지 저항하다 몰상당한 감문국 백성들의 원혼이 구름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백운산 전경(이름이 바뀌기 전에는 속문산) ,산 정상에는 산성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감문국의 멸망

진한의 맹주로 성장하던 신라는 경산의 압량국을 파사 이사금 23년(102년),벌휴왕 2년(185년)에는 의성의 조문국을 멸망시키고 드디어 서기 231년 감문국을 정벌하기 위해 출병했다.

 김천의 감문국과 주조마국은 변한계 국가다. 김해.함안.거창.성주.고령.김천.상주로 연결되는 고리를 끊지 않으면 신라는 위험에 처할 수 있고,추풍령을 확보해 금강유역을 점령하고 한강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인 요충지로서의 가치도 신라의 감문국 정벌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감천을 경계로 아포와 주조마국은 가야 연맹의 세력권이었고, 경북 중부의 가장 강성한 세력인 상주의 사벌국을 정벌하기 위해서도 신라는 감문국은 반드시 정복해야만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조분이사금 2년 (서기 231년) 이찬 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격파하고 그 땅을 군현으로 만들었다(신라본기,석우로조)

감문의 백성들은 강렬히 저항했다. 감문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속문산으로 들어가 산성에 의지해 신라군과 싸우다 전멸했고, 그 원한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속문산의 이름을 백운산으로 바꾸었다.

지금도 속문산성은 그 원형 일부가 완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감묵국은 멸망후 감문군이 되었다가 감문주로 승격했다.

개령군은 옛날 감문소국이었다가 진흥왕 18년(서기 557년)  군주를 두어 청주라 하였다가 진평왕때 폐지되었다가 문무왕 원년(서기 661년)에 감문군을 설치하였고,경덕왕이 개령군으로 지칭했다.(지리지 상주조)

창녕에 있는 신라진흥왕 순수비(척경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창녕비.국보33호)

창녕의 만옥정 공원에는 서기 561년(신라 진흥왕 22년)세워진 비석이 하나 있다. 신라 진흥왕이 재위 기간 중 영토를 확장하면서 그 확장된 지역을 돌아보고 정복지에 신라의 영토임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현존하는 진흥왕 순수비는 4개로 남한에 2개, 북한 지역에 2개가 있다. 창녕비는 진흥왕이 세운 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와 같은 순수비(巡狩碑)다. 다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제목이 보이지 않아 신라의 확장된 국경을 표시한다는 의미로 척경비(拓境碑)라 부른다. 

비석에는 감문군주(甘文軍主)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비석의 내용상으로는 진흥왕이 직접 행차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왕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다.신라 각 주의 군주들이 적혀 있는데 감문군주(甘文軍主)는 사탁(沙喙)의 심맥부지(心麥夫智) 급척간(及尺干)이라는 글이 명확하다.

서기 231년에 멸망한 감문국의 甘文이라는 이름이 330년 후에도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남 함안의 성산산성 목간(木簡)

감문이라는 이름이 신라에 멸망당한 후에도 계속 씌여졌다는 역사적 기록이 1992년 경남 함안의 성산산성에서 목간이 출토됨으로 더 확실해졌다. 이 목간의 용도는 물건의 꼬리표 (수화물표)라고 말할 수 있다. 김천사명대사공원내 김천시립박물관에 가면 복제품을 볼 수 있다.

목간 (木簡)이란 종이 대신 나무를 반듯하게 다듬은 면에 먹글씨를 쓴 기록 유산으로서, 당대 사람들이 직접 쓴 서사 자료로 당시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나무로 제작되어 주로 행정 기록이나 장부를 비롯한 관청 간 왕래 문서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휴대가 용이한 장점이 있어 간이 필기장, 물품 이동 시 꼬리표 등으로 활용됐다.

경남 함안 성산산성(咸安城山山城,사적 제67호)에서 출토된 목간,6세기경 제작되어 신라의 관등(官等) 성명이 적혀있다. 甘文城/下麥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함안 성산산성(咸安城山山城,사적 제67호)에서 출토된 목간의 제작 시기는 신라의 관등(官等) 성명이 등장하고, 신라 인명 표기법, 함안 성산산성의 축조 기법 등을 통해 볼 때 6세기경으로 판단된다.

평균 크기는 길이 16.3㎝, 너비 2.3㎝, 두께 0.6㎝이며, 목간을 제작한 나무는 소나무가 75% 이상으로 확인되고, 버드나무도 약 5.6%로 높은 비율을 보인다. 대부분 목간 끝부분이 '〉〈'형이거나 구멍을 뚫었는데 이곳에 끈을 묶어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곡물 꾸러미와 같은 물품에 매달 수 있도록 제작한 것으로, 물품의 표식을 위한 꼬리표로 부착된 것으로 보인다.

묵서의 내용은 크게 지명(地名), 인명(人名), 곡물명(穀物名)으로 나눌 수 있다.형태와 묵서된 내용을 통해 볼 때 세금으로 보내는 물건에 매달았던 하찰 목간(荷札木簡)으로 보이며, 어디에 사는 누가 무엇을 얼마나 보낸다' 등의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231년에 멸망한 감문국의 이름을 6세기경 신라의 성산산성 건설시 보낸 수화물 꼬리표가 발견됨으로써 계속 감문의 이름이 씌어졌음을 증명하는 유뮬이다.


# 고려왕의 군호(君號) 개령군

고려 성종은 961년 태조 왕건의 아들 대종과 선의태후 유씨(柳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969년 아버지 대종을 여의고 개령군(開寧君)을 세습했다.

981년(경종 6년) 경종이 위독하자 왕위에 올랐다. 전왕이자 사촌형인 경종은 성종의 여동생인 헌애왕후와의 사이에서 이미 2살 된 아들 왕송(王訟, 후일 목종)이 있었으나  너무 어려 국사를 맡을 수가 없었다. 

성종 왕치는 아들이 없었고, 선왕 경종의 장남 왕송을 후계자로 세우기로 했다. 성종은 서경으로 순수했을 때 조카 왕송을 데리고 갔다. 서경 장락궁에서 왕송을 개령군(開寧君)로 봉했는데, 이 군호는 바로 자신의 옛 군호였다. 즉 정윤 칭호도 아니고 태자 칭호도 아닌 개령군 군호를 물려줌으로서 자신의 후계자로 공인하고 자식처럼 길렀다.

광종 16년 왕태자 책봉과 함께 왕위 계승자를 의미하던 태자 칭호 사용을 금지하면서, 종실들의 칭호를 새로 제정하여, 지명을 군호로 삼는 봉작제가 정비된다. 지명을 이용해 봉작한 초기 봉군제(封君制)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지명을 이용해 종실들을 일률적으로 봉군하였다는 것은 종실 간에도 일종의 서열화와 신료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태조대의 다소 자율적이었던 칭호와는 다르게 제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광종대 이후 봉군된 왕족들의 군호를 살펴보면 개령군(君) ,대량원군(君) 연경군(延慶君),평양군(君) ,애상군(哀殤君),낙랑군(君) 등이 있다.

 

차기 왕이 될 사람이 사용하는 군호( 君號)는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데 개령(開寧)이라는 지명이 군호로 주어졌다는 것은 개령이 감문국이라는 고대국가의 수도라는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향토 사학계는 평가하고 있다.

 

글.사진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ksu3827@naver.com

<자문 >

문재원 (향토사학자,前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이갑희(경북 향토사연구회 회장역임,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국악진흥원자문위원)

<참고문헌>

김천시사(김천시)

김천의 발굴유적(김천문화원)

조상의 얼찾아(문재원)

금릉빗내농악 (민속원)

대구.경북 청동기시대 문화(삼한문화재연구원)

김천의 마을과 전설(김천문화원)

디지털김천문화대전  

옛 상주를 담다(상주박물관) 

김천의 발굴유적(김천문화원) 

감문국개령지(우준식) 등

 

#황악신문 #감문국의 멸망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ksu38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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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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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서익 2021-04-12 20:48:44

    수고 많습니다. 그런데 "유방이 항우와의 대결에서 승리해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韓나라를 세웠다". 와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됐다" 에 대해서 한번 더 조사를 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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