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뉴스 기획특집
김천의 유적지를 찾아서 5) 동학의 聖地 구성 용호리와 어모 다남 참나무골“사람이 하늘,외세와 不義에 저항한 동학의 울림 여전히 김천인의 DNA에 남아 있어”
  • 김서업 대표기자
  • 승인 2020.04.24 13:55
  • 댓글 0

계절을 거꾸로 가는 듯 봄바람이 차다. 金泉人으로 살면서 우리는 김천을 너무 모른다. 산이 깊으면 골도 깊다. 그 골에는 사람이 살고 인간이 사는 곳에는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씹으며 다시 늙어가고 후손들에게 소중한 스토리를 전해줄 의무가 있다.                

                해월 최시형(崔時亨 1827~1898)

김천에 동학의 聖地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동학을 연 이는 수운 최제우지만 동학을 세운 이는 해월 최시형이다. 해월을 빼놓고 동학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는 이유다.

그는 수운이 참수당한 후 35년의 긴 세월동안 도망 다니면서 동학을 재건한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최보따리다. 어릴때의 이름은 최경상이다. 고아로 자라 남의 집 머슴과 심부름꾼으로 전전하다 수운을 만나 도통을 이어받았다.

그가 주장한 인시천(人是天)사상은 후에 손병희에 의해 인내천사상으로 승화된다. “사람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인위로써 귀천을 나눔은 한울님 뜻에 어긋나는 것이고, 도인들은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토록 해야 한다.”는 평등의 사상을 역설한다,

해월은 1888년 3월 손병희의 누이동생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았고, 많은 교도들 특히 여성 교도들이 몰려들자, 1890년 11월 금릉군 구성면 용호동(지금 김천시)에 있는 교도 김창준의 집에서 1달여 머물면서  강론을 하고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지어 돌렸다. 여성의 수도 방법과 지켜야 할 생활 태도를 제시한 것이다.

구성면 용호리 입구에는 1990년 대한천도교여성회가 내수도문 반포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 건재하다.

 용호리는 세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아랫마을,복호동,와룡동이다.

             아랫마을

伏虎는 엎드린 호랑이의 형국이 있다는 말인데 나의 눈은 정확히 호랑이를 찾지 못했다.

                복호동 입구의 표지석

          복호동 전경

     복호동 흙집

복호동 느티나무

          와룡리 솔숲

 臥龍은 누워있는 용의 형국을 말하는데 너무도 선명히 보였다. 하지만 카메라에 제대로  담을 수는 없었다. 드론이 있어야 제대로 찍을 수 있을 듯 했다. 

          와룡리의 龍의 형상을 닮은 뒷산

하지만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용은 그 꿈틀거림이 지금껏 본 산중에 압권이었다. 김천에 이렇게 아름다운 산세가 있었는지 눈을 비비고 몇 번을 다시 보았다.

와룡리

언제 시간이 나면 용호리에 가보시라~~ 그 龍의 늠름함에 감탄할 것이다.

                    복호동의 동학 교당

    복호동의 동학교당 입구-문은 닫혀있고 풀이 무성하다

해월은 1개월 정도 복호동 김창준의 집에 머물면서 경전을 집필했지만 지금은 다 사라지고 동학의 교당은 낡아서 사람이 쓸 수 없을 정도다. 민족종교 동학(천도교)의 교세를 짐작해 본다. 조금 더 번창하면 좋으련만~~

              마을 동학의 역사를 설명하는  이우균 옹

교당을 관리하고 있는 이우균 (82세)옹은 예전에 비석을 세울때는 큰 길에 전국의 신도들이 차를 세우고 걸어 들어올 만큼 많았는데 지금은 1년에  한두 번 가을철이며  열 서너명이 찾는 수준이라고 귀뜸했다.

          어모 다남리 참나무골

1893년 해월은 두 번째로 김천을 방문한다. 어모 다남2리 참나무골이 그곳이다. 동학의 지도자 편보언(1866-?)의 집에 머물면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했다.

           참나무골  

1894년 9월 해월은 김천의 동학농민군에게 기포령을 내리고 선산의 관아를 점령하기도 했다. 농민군의 목표는 선산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없애는 것이었다.

김천시의회에서 70주년을 기념해 펴낸 <김천의 독립운동 그리고 운동가들>에 실린 편보언의 기록을 보면 ,참나무골에 동학이 퍼지기 시작해 동학촌이 되었고, 최시형이 칠곡과 안동을 거쳐 그의 집에 숨어들었고, 교도를 모아 정부를 공격하고 국가를 혁신하자고 권유하자  동학 포교에 50마지기의  전 재산을  투자했다고 적혀있다.

이 동네에는 여전히 편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주민들은 증언했다.

1894년 2월 조병갑의 폭정으로 전봉준에 의해 동학농민운동이 촉발되었고, 그해 9월 편보언에게도 기포령(起包令)이 내려지자 접주들에게 기군령(起軍令)을 내렸다. 이 때 편봉언은 동학군의 중간 간부인 도집강이었다. 이 때 집결장소인 감천의 모래밭에는 수 많은 농민군으로 발 들여 놓을 틈이 없었다. 그들은 금산과 상주,예천의 농민군과 함께 선산관아를 공격해 접수했으나 새벽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수 백명이 전사하고 패퇴한뒤 재건하려 했지만 10월5일 관군이 들어와 모두 잡혀 죽거나 흩어졌다.

이후 최시형은 평창군 봉평면 무이리의 농민군 최후의 전투가 패배한뒤 강원도와 경기도를 오가는 4년의 도피생활 끝에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마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돼  종로3가 근처 형장에서 처형되고 만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또 있다. 해월에게 사형을 내린 판사가 바로 고부민란을 촉발한 조병갑이다. 1892년(고종 29) 4월 민비에게 7천냥을 뇌물로 바치고 전라북도 고부군수(古阜郡守)가 되어 1893년 본전을 위해 만석보(萬石洑:貯水池 농수 저장)를 증축할 때 군민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공역을 시키고,수세(水稅) 700여섬을 징수착복, 태인군수(泰仁郡守)를 지낸 부친의 비각(전북 신태인 피양정)을 세운다고 금품(1000여냥)을 강제 징수하고 기타 여러가지 가공의 죄(불효(不孝)·불목(不睦)·음행(淫行)·잡기(雜技))를 물어 백성들의 재산 몰수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다가 1894년 군민대표로 진정을 한 전창혁을 죽임으로서 전창혁의 아들 전봉준이 난을 일으키게 한 장본인이다.

민란이후에  도망친 조병갑은 고금도에 유배된 뒤 1895년 사면되어 판사가 되어 해월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해월에게 사형을 언도한 판결문 -판사 조병갑의 이름이 선명하다

이 조병갑의 증손녀가 노무현의 입이라 불리던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다.

해월이 주장하던 事人如天(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과 인시천(人是天,사람이 곧 하늘) 평등사상, 부녀자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섬김은  서양의 그 어떤 사상보다 가치있게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늘이고 한울님이라는 데 그보다 더 귀한 사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120여 년 전 우리 할배들도  해월과 함께 일본군을 치고, 썩은 세상을 개혁하기 위해 감천변에 죽창을 들고 서 있었을  것이다.

우리 金泉人의 피 속에는 불의에 항거하는 기백과 DNA가   悠久히 전해내려 왔음이 분명하다.

오늘은 동학의 주문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를 암송하며 그 소중한 가르침을  기억해 보려한다.

“힘내라 김천!!!”

 

#김천황악신문 #해월최시형

김서업 대표기자  hwangaknews@hanmail.net

<저작권자 © 김천황악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서업 대표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