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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의 혼이 서린 원계서원(遠溪書院)...“파리장서 사건의 중심인물 공산(恭山) 송준필 선생 배향“[김천의 문화재를 찾아서 15]
  •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 승인 2023.09.3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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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원골마을 원계서원

“박정희 대통령 친필...숭덕사(崇德祠) 편액도 걸려 있어”

 

김천의 골짜기(谷)는 깊고 넓다. 지역에서 태어나 50년 이상을 살았지만 김천의 못 가본 자연부락이 훨씬 많다.

황악산 줄기인 고성산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리한 원골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잘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만 토끼처럼 다니다 보면 그게 다인줄 알고 산다.

골짜기마다  많은 이야기들이 여전히 살아 숨쉰다.

원골은 원동(院洞 )이라고도 불린다. 행정동은 대곡동이지만 실제로는 완전 시골처럼 느껴진다.

원골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말까지 남원(南院)이라는 관리들의 숙소가 있어서 유래된 이름이다.

서부초등학교를 지나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을 지나 좌측 음지마 마을 우측 언덕에 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서원의 이름은 원계서원(遠溪書院)이다.

영남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공산 송준필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다 별세한 장소로 신주를 모시고 춘향제를 올리는 곳이다.

이 파리장서 사건의 중심에 공산 송준필 선생이 있다.

공산 송준필은 1869년 성주군 초전면 야성 송씨 종택인 백세각에서 태어나 15세에 여씨 부인과 성혼하고 18세에 사미헌(四未軒) 장복추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다.

1907년 동래와 대구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해 성주 지역을 돌며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일제의 강점 전후 송준필은 고향인 고산동에서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했다. 생도들이 늘어나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1914년 가을에는 5칸의 건물을 신축하고 고양서숙이라 이름지었다.

선생은 1910년 37세 되던 해에 을사5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향교에서 참오적소(斬五賊疏) 올리고 저술과 후진양성에 힘썻다.

1912년 44세 때 서간도로 가 독립운동을 꾀했지만 노친의 병환 때문에 되돌아 왔다.

1919년 3·1운동 이후 유림 세력들은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인물중에 유림이 빠져 있다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곽종석(郭鍾錫)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고 청원하기로 합의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는 서한에 김천 지역을 비롯해 명망 있는 영남 유림들이 서명에 참여했다. 이것이 독립사에 한 획을 그은 파리장서 사건이다.

박정희 친필 숭덕사 편액

김천 출신 유림으로서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으로는 송준필(宋浚弼)을 비롯해 최학길(崔鶴吉), 이경균(李璟均), 이명균(李明均), 이석균(李鉐均) 등이 있다. 송준필은 그의 종택인 성주 백세각에 친족과 자제들을 불러 모아 파리 장서를 제출하고 독립 시위를 독려했다.

1919년 파리장서사건의 중심인물로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룬 후 1933년(65세) 성주에서 원골로 옮겼다.

선생은 일제의 단발을 거부하고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해 지금 존재하는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

1938년 도산서원과 금오서원 원장에 부임하고 1942년(74세)에 원계정사가 낙성됐다.

그 다음해 7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성주로 장사를 치룰 때 모인 인원이 2000여명이었고 장례행렬만 수십 리에 달했다.

1968년 (사후 25년) 유림들에 의해서 원계서원,이듬해 숭덕사가 차례로 낙성된다

1990년 (사후 47년)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공산 송준필의 아들 은포(隱圃) 송수근 선생

 

공산 선생의 아들인 은포(隱圃) 송수근 선생도 아버지를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아버지인 공산 선생이 만든 통고문을 각처로 배포하고 1919년 파리장서운동과 3.1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성주읍 장날 만세시위운동으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30일 보안법으로 기소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7월을 선고받고 복역하기도 했다.

저술로는 문집인 은포문집이 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정부가 송수근 선생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1930년 3월1일 시작한 김천고등학교 본관 상량문을 지은이도 야성 송수근이다. 그가 지은 상량문의 첫 구절은 “ 문명이 우리나라에 분명히 드러났으니 청년들이여 어찌 배우지 않겠는가?”로 시작된다.

송수근 선생은 최 송설당 여사가 김천고보를 설립할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한 이한기 이사와 사하생(査下生.사돈)관계다. 

이후 송씨 집안과 송설학원은 누대에 걸쳐 깊은 인연으로 이어져 왔다.

송수근 선생의 혼맥은 퇴계와 경주 최 부잣집과도 연결되어 있다.

김천농고 설립 30주년 기념탑
탑 동판에 새겨진 송수근 선생의 이름이 선명하다.

송 선생은 김천농고 설립에도 기여했다. 김천농고가 개교 30주년을 기념해 세운 정문앞 탑 동판에도 송수근 선생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공산 선생의 가족과 친척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하지만 위대한 독립운동의 정신이 서린 원계서원의 현실은 초라하다.

담이 여러 차례 무너져 사비를 들여 시멘트블록으로 쌓았다.

태풍에 무너진 담벼락
최근 보수된 담벼락

 

좀으로 썩어 들어가는 마룻장 올해 보수될 예정이다.

2년 전 방문했을 때는 태풍으로 담벼락이 무너지고 서원의 나무판자는 좀으로 썩어들어가고 있다.

다행히 지금은 무너진 담은 수리되었고, 올해 내 서원의 썩은 마루는 보수될 예정이다.

퇴계학파를 계승한 유림(儒林)의 거목이요, 독립운동의 한 획을 그은  공산 선생의 魂이 서린 원계서원은 사유지란 이유로 지금까지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

최근 김천시의회에서 비지정문화제 지원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어 앞으로는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 공산(恭山) 송준필 선생과 아들 은포(隱圃) 송수근 선생의 묘소는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해 고단한 생을 뒤로한 채  영면(永眠)에 들었다.

#황악신문#원계서원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ksu38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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