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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이 머물며 경전을 반포한 동학의 聖地 <구성 용호리> [11]
  •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 승인 2023.08.2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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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가는 교당, 인적은 끊어지고 마당엔 풀만 무성”

“사람이 하늘,외세와 不義에 저항한 동학의 울림 김천인의 DNA에 남아 있어”

해월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인터넷 캡처

김천시 구성면은 유서 깊은 지역이다. 현재는 골프장으로 변한 구성 송죽리에서 신석기와 청동기시대 유적이 대량 발굴됐다. 지난 2019년 12월 30일 보물로 지정된 2층 누각 방초정(芳草亭),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 가례증해 판목,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인 「이숭원 초상화」,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88호인 성산여씨 하회댁, 덕대산성, 도동서원이 있다.

구성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김면,곽제우 등과 石峴(돌고개)전투에서 승리한 의병장 여대로 창의비(呂大老倡義碑)도 국도변에 있다.

구성에서 지례 조금 못미처 우측으로 빠지면 용호리가 있다. 용호리는 와룡(臥龍),복호(伏虎)의 조합으로 생긴 지명이다.

작내역 450살 느티나무/황악신문

용호리 가는 길에 작내리가 있다. 작내역(作乃驛)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조선시대까지 역리 25명과 말4필, 창고가 있던 흔적은 사라졌다. 1890년대까지 있던 장승도 없고,그 자리에는 450살 느티나무 노거수가 마을의 역사를 증언한다.

큰 가지가 태풍에 찢어지고 남은 가지가 자랐는데도 수세(樹勢를 자랑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좌측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내(川)가 있고 그 옆에 큰 비석이 하나 서 있다. 1990년 대한천도교여성회가 내수도문 반포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기념비다. 내수도문과 비석을 세운 내력이 적혀있다.

조금 위에는 250살 느티나무 보호수가 내려다 보고 있다.

복호동 안내석/황악신문

김천에 동학의 聖地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동학을 연 이는 수운 최제우지만 동학 뼈대를 만든 사람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다. 해월을 빼놓고 동학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는 이유다.

그는 수운이 참수당한 후 35년 동안 도망 다니면서 동학을 재건했다. 하도 옮겨 다녀서 별명은 최보따리다. 어릴 때 고아로 남의 집 머슴과 심부름을 하며 살다 수운을 만나 도통을 승계했다.

그가 주장한 인시천(人是天)사상은 손병희에 의해 인내천사상으로 발전한다.

해월은 손병희의 누이동생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많은 여성 교도들이 몰려들자 1890년 11월 구성면 용호동 교도 김창준의 집에서 1달여 머물면서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을 만들어 반포했다.

 내칙은 부인들이 포태를 했을 때 필요한 준칙으로 태교에 관한 내용이다. 내수도문은 부인들이 일상생활에서 행해야 할 일곱 조목을 담았다.

복호리 전경/황악신문

용호리 자연 마을은 복호와룡·복호·각골·아랫마가 있다. 伏虎는 엎드린 호랑이의 형국이 있다는 말인데 몇 년째 와서 아무리 봐도 엎드린 호랑이는 보이지 않는다. 좁은 동네길에 들어가면 갈라지는 길 언덕에 300년은 족히 됨직한 팽나무 한그루가 가지를 펼치고 싱싱하다. 아래쪽에는 표피가 멋진 수 백살 소나무 한그루가 눈에 띈다.

천도교 교당/황악신문

경사가 있는 오르막을 조금 오르면 천도교 교당이 있다. 해월이 머물던 장소다. 해월은 1개월여 복호동 김창준의 집에 머물면서 경전을 집필했다.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만든 동학 교당은 낡아서 사람이 사용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마당에는 풀이 자라고 있다. 암담한 민족종교 동학(천도교)의 교세를 말해준다.

3년 전 쯤 교당을 관리하고 있던 이우균 (당시 82세)옹은 “예전에 비석을 세울 때는 큰 길에 전국의 신도들이 차를 세우고 길이 비좁을 만큼 걸어 들어왔는데, 지금은 1년중에 가을철 한두 번 열 서너명이 찾는 수준”이라고 귀뜸했었다.

태양광의 광풍은 이 깊은 골짜기까지 번졌다. 반대 현수막이 붙어 있고, 연안 이씨 재실로 올라가는 길에는 차가 중앙에 주차되어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다.

다시 동네를 나와 산골짜기로 올라가면 와룡리가 있다. 와룡리 입구에는 노거수 소나무가 즐비한 동네 숲이 있고, 돌로 쌓은 당산이 있다.

용을 닮은 와룡리 뒷산/황악신문

臥龍은 누워있는 용의 형국을 말하는데 산의 형상이 구불구불한 것이 용을 닮았다. 드론이 있으면 더 선명한 산의 형상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1893년 해월은 두 번째로 김천을 방문한다. 어모 다남2리 참나무골이 그곳이다. 해월은 동학의 지도자 편보언의 집에 머물면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했다.

김천시의회에서 독립 70주년을 기념해 펴낸 <김천의 독립운동 그리고 운동가들>에 실린 편보언의 기록을 보면 ,참나무골에 동학이 퍼지기 시작해 동학촌이 되었고, 최시형이 칠곡과 안동을 거쳐 그의 집에 숨어들었다. 교도를 모아 정부를 공격하고 국가를 혁신하자고 하자 동학 포교에 50마지기의 전 재산을 투자했다.

이 동네에는 여전히 편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1894년 2월 조병갑의 폭정으로 전봉준에 의해 동학농민운동이 촉발되었고, 그해 9월 편보언에게도 기포령(起包令)이 내려지자 접주들에게 기군령(起軍令)을 내렸다.

와룡리 마을숲/황악신문

이 때 편봉언은 동학군의 중간 간부인 도집강이었다. 이 때 집결장소인 감천의 모래밭에는 수 많은 농민군으로 발 들여 놓을 틈이 없었다.

그들은 금산과 상주,예천의 농민군과 함께 선산관아를 공격해 접수했으나 새벽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수 백명이 전사했다.  패퇴 후 재건하려 했지만 10월5일 관군이 들어와 모두 잡혀 죽거나 흩어졌다.

이후 최시형은 평창군 봉평면 무이리의 농민군 최후의 전투가 패배한 뒤 강원도와 경기도를 오가며 4년의 도피생활을 하던 중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마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돼 형장에서 죽었다.

120여 년 전 김천의 우리 할배들도 해월과 함께 일본군을 치고, 썩은 세상을 개혁하기 위해 감천변에 죽창을 들고 서 있었을 것이다.

와룡리 당산/황악신문

金泉人의 피 속에는 삼한시대 지역 최초의 국가인 감문국부터 임진왜란을 거쳐 일제 강점기까지 불의에 항거하던 기백과 DNA가 悠久히 전해왔다.

구성의 외진 골짜기 용이 노닐고 호랑이가 엎드린 품안에 세운 동학교당에는 인적은 끊어지고 풀만 자라고 있다.

하지만 “한울님을 가슴에 모시고 조화를 이루며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맹세를 담은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를 암송하던 동학교도들의 주문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해월이 김천을 떠난지 2년 후인 1896년 동학농민 전쟁의 선봉장으로 참가했던 김창수(김구)가 일본군 특무장교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죽이고, 용호리와 가까운 부항면 달이실 마을 성태영의 집에 숨어 이름을 김구로 개명한 것이 지역 동학의 역사와 무관치 않다.

#황악신문 #해월 최시형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ksu38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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