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연속기획 김천의 문화재를 찾아서
500년 세월동안 부서져 폐탑(廢塔)으로 내버려진 비운의 사자사(獅子寺) 3층석탑 (7)
  •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 승인 2023.07.05 14:51
  • 댓글 0
개령 서부리 사자사 3층석탑

“천 년 전 사자의 큰 기운 품고 감천벌을 호령하다

숭유억불의 거센 바람에 갈기갈기 찢겨

목재는 향교의 기둥과 서까래가 되고

쓸모없는 돌덩이는 여섯 조각으로 깨어지고 무너져

500년 세월 구박받다

이제야 갈비뼈를 바꿔 욕된 몸을 일으켰네

사자사 3층석탑의 복원 전 모습

개령 사자사 석탑은 호두산에서 신룡리 방면으로 뻗던 야산이 뱀의 형상인 사산(蛇山)과 연결되는 아래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김천 최대 규모의 삼층석탑이다.

개령 서부리 삼층석탑 옛 이름은 폐탑이다.

삼층석탑이 있던 곳은 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자사(獅子寺)가 있던 절터였는데, 1473년(성종 4) 개령현감 정난원(鄭蘭元)이 절을 허물고 그 자재로 개령향교를 세웠다.

당시 사자사의 목재와 석물들은 대부분 향교 건축에 쓰였고 너무 커서 용도를 찾지 못한 몇 개의 석탑 잔해들만 버려져 외로이 천년의 절터를 지키다 지난 1997년 현재모습으로 복원됐다.

종교와 정치의 편향적 이념성은 과거나 현재나 모든 것을 파괴한다. 숭유의 기치 아래 500년 이상을 내려오던 사찰을 파괴해 부자재로 향교를 짓는다는 이 무지막지한 발상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부리 3층 석탑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김천의 문화재 기행은 다소 척박하다. 문화홍보실이 펴낸 책자가 그나마 위안이 된다.

지금은 안내판이 서 있지만 몇 년 전에는 물어물어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김천에서 제일 큰 탑이 처한 현실이다. 40미터 가까이 존재하던 김천의 고대국가인 감문국 왕비의 능으로 추정되는 장릉(장부인릉)은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다.

탑 아래에서 포도밭을 일구던 주인과 장부인릉이 있던 밭의 경작자인 노인은 꽤나 불만이 많았다.

“탑이 복원되어 500미터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애물덩어리다. 몇 년 전 김천시에서 밭을 사겠다고 해서 도장을 찍어줬는데 감감무소식이다.길도 주었는데 함흥차사다."라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오래된 탑의 하단부는 누가 팔아먹었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반출된 것을 말함이다. 실제 탑신의 하단부는 복원시 새로 갈아 끼운 흔적이 역력하다.

김천의 문화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감문국의 역사다. 사료도 풍부하고 고증도 가능하다, 감문을 노래한 詩들도 여러 편 있다.

얼마든지 복원할 수 있고 무궁무진한 스토리텔링의 寶庫이기도 하다.

개령 서부리 사자사 3층석탑

# 개령향교

계림사에서 5분정도 걸어 내려오면 왼쪽 언덕에 향교가 우뚝 서 있다. 바로 개령향교다. 개령향교는 긴 세월동안 부침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대성전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 118호로 지정되어 있다.

개령향교는 조선 전기 개령 현청 소재지의 서쪽에 위치한 서부리 웅현(熊峴)고갯마루에 자리한 사자사(獅子寺)라는 절에 ‘개령향교’라는 현판만 달아 임시 향교로 사용했다.

당시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세태 속에서 향교를 건립해야 할 형편이었으나, 지역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인근의 절을 폐하고 임시 향교로 사용했다.

1473년(성종 4년)에 이르러 개령현감 정난원이 관아 북쪽에 새로이 향교를 세우면서 사자사를 허물어 목재와 석재 대부분을 새 향교 건립에 재사용했다.

이후 1522년(고종 18)과 1563년(명종 18)에 현감 태두남과 윤희주가 중창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디에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이후 1600년(선조 33년) 개령현 소속인 아포 출신 길운절(吉雲節)이 역모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1601년(선조 34년) 개령현이 폐현되고 개령 출신 유생들의 출사길이 막히는 등 개령은 최고의 시련을 맞게 된다.

이 시기 개령향교는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황폐화되기에 이른다.

끊임없는 지역 유림들의 복현 상소가 마침내 받아들여져 1609년(광해군 1) 개령은 다시 현으로 복현됐다. 이에 지역 유림이 중심이 되어 흥학(興學)을 기치로 복현을 기념하는 향교 재건 운동에 들어가, 1609년 현감 이창거 등이 주동이 되어 경관이 수려한 유동산 아래 감천 변에 향교를 새로 지었다.

#개령향교 명륜당

그러나 감천과 인접해 여러 차례 물이 범람하여 침수되자 향교 이전에 대한 여론이 높아졌다. 현민들의 오랜 염원에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향교 이전은 1866년(고종 3년) 현감 이양직이 수해로부터 안전하고 감문산과 관학산의 중간으로 예부터 명당으로 알려진 지금의 자리에 터를 마련하면서 중흥을 맞게 됐다.

1881년(고종 18)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 주재 청나라 참사관인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입수해 고종에게 바치고 개혁을 주창했다. 이에 전국의 유생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김홍집을 탄핵하고, 개화에 반대하는 연명 상소인 만인소를 올렸다. 이때 영남 지역에서는 개령향교가 중심이 되어 만인소를 주도해 전국적으로 개령향교가 크게 주목 받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김홍집의 개혁을 고종이 받아들여 개화를 했더라면 역사가 어찌 변했을지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개령향교가 영남유생들의 개화반대 중심지였던 것이다.

조선말기에는 김천이 TK를 너머 영남 보수세력의 핵심이었나 보다.

개령 서부리 사자사 3층석탑

현존하는 개령향교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지만, 여전히 더욱 안타깝고 눈에 밟히는 것은 사자사 석탑과 장부인릉이다.

곰고개에 2000여년의 긴 세월을 잠들지 못하고 몸을 누인 채 사자사의 흥망을 지켜보고, 일제 말기에 달랑 사진 한 장 남기고 파괴된 장부인릉!

지역의 가장 큰 3층 석탑을 쌓았던 통일신라시대 사자사(獅子寺)의 발굴과 복원은 지금보다 더 크고, 더 강한 김천이 되어야만 현실화 될 수 있을까?

 

#황악신문 #사자사 삼층석탑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ksu3827@naver.com

<저작권자 © 김천황악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오늘의 주요뉴스
김천시의회,내년 예산안 1조 3650억원 심사 시작
김천시의회,내년 예산안 1조 3650억원 심사 시작
김천의료원,슬기로운 시민건강강좌...여성호로몬 치료,녹내장 관리 등 4강
김천의료원,슬기로운 시민건강강좌...여성호로몬 치료,녹내장 관리 등 4강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