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기성 (감성스토리교육원 역사전문강사)

최근 덕수궁 돌담길에 위치한 정동극장에서 “정동길의 역사”를 주제로 역사에 관심 많은 우리 시민분들을 모시고 강연을 했다. 나의 관심은 조선 후기 임진왜란 직후에 쏠려있었다. 바로 정동길의 입구,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앞에 위치한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생가터”였다. 그 둘은 부자지간이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위치한 덕수궁 즉조전의 존재 또한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동길을 걷는 사람들이 덕수궁 중화문과 중화전 그리고 덕수궁 석조전의 근대적인 모습과 상징성에 관심이 큰 것과는 대조적이다.

자주적 근대를 표방하며 출범했던 대한제국, 근대란 신분제 철폐와 자본주의의 도입 그리고 내각책임제 도입에 다름 아니었다. 신분제의 철폐란 바로 유교 성리학적 이념을 포기하고 근대 자유주의에 입각한 만민 평등주의의 도입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대한제국의 상징인 정동길의 초입에는 유교 성리학의 신분제 강화의 표상 “예학”의 일인자를 기념하고 있다. 또한 덕수궁 즉조전의 경우, 도저히 하나의 궁궐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왜소한 건물을 보며, 1593년부터 1608년까지 15년 동안 임금과 관료의 정궁이 거기였던 것에 불쾌할 지경이었다.

420년이 지난 지금의 내 마음도 그러할 진대, 자기 집 바로 건너편에서 매일같이 그 광경을 봐야 했던 김장생과 김집 부자의 당시 마음은 어떠했을까. 왜란의 처참한 광경은 당시 모든 조선백성들을 집단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증상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거리에 시체는 즐비했고, 산하는 불타고 있었으며, 중심지는 파괴되고 군중은 학살당했다. 신분질서는 무시되었다. 이런 사회상황에서 성리학적 보수질서를 강조하는 예학(禮學)의 대두는 당연한 결과였고, 그 태두가 바로 그들 부자였다. 그 둘은 붕당 중 서인의 태두로써 일평생 검약하고 꼿꼿한 인생을 살아서, 예학의 모범을 보였다. 그런데 왜일까. 그 사람들에게 감명을 받지 않는다. 역사학도로써 그저 그 시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뿐이다.

그들보다는 덕수궁 즉조전에 더 집중한다. 거기는 당시의 영의정이자 국가비상대책위원장인 도체찰사였던 오리 이원익이 왜란 이후, 망가질대로 망가진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회복시키려면, 그들의 다친 몸과 마음까지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한 장소였다. 그의 머리에는 망가진 성리학적 신분질서나 왕권의 회복 등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은 백성들의 사회가 회복되면, 모두 자연스레 회복 될 것이고, 또한 전란의 책임자인 왕과 양반들이 피해자인 백성들을 대상으로 통제를 강화한다는 것은 넌센스였다. 덕수궁 즉조전 그 초라한 곳에서, 그런 애민정신으로 탄생한 전후복구대책이 조선 최고의 개혁 “대동법”이다.

바로 오늘 새벽 428조 8천억원 규모에 달하는 현 정부 첫 정부예산이 진통 끝에 국회를 통과했다. 이 예산은 전임 행정부의 부정부패에 이른 탄핵을 극복한 국민들에게 현 행정부가 바치는 개혁입법의 총체다. 이러한 상황을 보며, 난 김장생과 이원익의 역사적 대립을 생각했다. 왕권과 지배층의 기존질서회복을 꾀한 김장생과 피해자 백성들의 민생회복을 꾀한 이원익, 전자는 예학 이라는 이름으로, 후자는 대동법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오늘 새벽까지도 국회에서는 분명, 국민을 생각하는 방식을 달리해 양편으로 나눠 격렬하게 다퉜을 것이다. 어느 세력이 역사에 길이 기억될 족적을 남기게 될까. 어떤 정치적 대립이든, 김장생과 이원익처럼 페어플레이 대결로 어려움에 빠진 민생에 도움을 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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