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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자(爲政者)들의 한결같은 마음가짐
  • 김천황악신문
  • 승인 2017.11.27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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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택용/경북도문화융성위원회 위원

요즈음 위정자(爲政者)들이 백성을 돌보기에 정성을 들이지 아니한 것 같다. 백성은 나라의 주인이므로 잘 보살펴야 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창협(金昌協)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으로 당대 명문가 출신으로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아버지 수항(壽恒)과 형 창집(昌集)이 모두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다. 육창(六昌)으로 불리는 여섯 형제 중에서 특히 창협의 문(文)과 동생 창흡(昌翕)의 시(詩)는 당대에 이미 명망이 높았다.

그는 1669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1682년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 좌랑, 사헌부 지평, 승정원 동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등을 지냈다. 아버지 수항과 중부 수흥(壽興)은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는데, 그가 충청도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전라도 진도에서 사사되자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양평에 숨어 살았다. 1694년 갑술옥사 후 아버지의 누명이 벗겨져 호조 참의,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는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소학에 대해 토론했고 이이(李珥)의 학통을 이었으나 호락논쟁에서는 낙론의 입장을 취했다. 글이 전아하고 순정한 문체를 추구한 고문가로 전대의 누습한 문기를 씻었다고 평가를 받았으며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는 『농암집(農巖集)』 권24 인민당기(仁民堂記)에서 ‘평소 일이 없을 때에도 늘 백성들에 대해 간절한 정성을 품어야 하니, 부모가 자식에 대해 병이 있으나 없으나 늘 걱정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라고 말했다.

인천 부사(仁川府使) 이희조(李喜朝)의 부친인 이단상(李端相)이 1664년에 인천 부사를 지냈는데,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1696년에 이번에는 아들 이희조가 또 인천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희조는 홀로 계신 모친을 모시고 부임하면서 크게 탄식하며 ‘이곳은 우리 선친께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곳으로, 그 은혜가 아직도 남아 있다. 내가 만일 잘 다스리지 못해 이곳 부로(父老)들에게 질책을 받는다면 어떻게 사당에서 선친을 뵐 수 있겠으며, 어떻게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릴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고을 이름에 어질 인(仁) 자가 있으니, 내가 더욱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말했다.

얼마 뒤 팔도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줄줄이 죽어 나갔는데, 이희조는 수령으로서 성심을 다해 구휼하여 고을에서 유랑하거나 굶어 죽는 자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러자 백성들도 기뻐하였고 소문이 퍼져 서울에까지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이희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정무를 보는 동헌(東軒)의 이름을 ‘백성을 사랑한다’는 뜻의 ‘인민당’으로 짓고, 매형인 김창협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김창협은 왕명을 받아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으로서 기근과 같은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맹자가 문왕(文王)에 대해 백성 보기를 다친 사람 보듯이 하였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애지중지하는 자식이 다쳤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위정자가 백성들을 대하는 자세가 바로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렇게 되려면 수령이 평소 일이 없을 때에도 늘 백성들에 대해 간절한 정성을 품어야 하니, 부모가 자식에 대해 병이 있으나 없으나 늘 걱정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의 작은 성취에 도취되지 말고, 문왕 같은 성인을 목표로 삼고 더욱 노력하라는 김창협의 간곡한 뜻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희조가 떠나더라도 앞으로 이 지역에 수령으로 와서 이 동헌에 앉아 정무를 볼 뒷날의 수령들 역시 이 기문을 읽고서 이러한 뜻을 가슴에 새기고 백성들을 보살필 것을 당부하는 김창협의 심원하면서도 세심한 마음까지 읽힌다.

역사는 문화유산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우리들이 유적지에 가서 만나는 건물이나 누정(樓亭)의 현판과 기문에는 이렇듯 다양한 사연이 들어 있으며, 그 속에는 선조들의 깊은 애민(愛民) 정신이 담겨 있다. 오늘날 문화유산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 건축 양식과 같은 형태적인 데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건물 이름 하나를 지으면서도 그곳에 살 사람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까지 생각했던 선조들의 마음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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