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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甘文(감문)의 슬픈 노래 9)“궁궐의 주춧돌을 찾아서”“감문국의 주춧돌은 사라지고, 장군의 무덤만 쓸쓸하네”
  • 김서업 대표기자
  • 승인 2020.04.2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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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문국의 백성들은 신라의 배신에 치를 떨며 노예처럼 살아가는 굴종의 삶을 거부하고 장부인과 함께 속문산으로 들어가 신라군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다 전멸했다.

그들의 넋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름이 되어 오랜 세월동안 속문산을 뒤덮었다.

그 후에 사람들은 속문산을 일컬어 백운산이라 이름 했다.

백운산에서 싸운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죽은 이들의 피를 먹고 모진 목숨을 이어갔다. 사로(신라)도 더 이상 감문국을 심하게 괴롭히진 않았다.

죽어간 이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도 허락했고, 감문국의 지배자를 뽑아 자치를 허용했다.

아버지를 잃은 어린 부용(浮溶)도 신라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지만 힘이 약해 멸망한 나라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젠가 감문국을 부흥시키리라 마음먹었다. 겉으로는 신라에 복종했지만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원통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신라는 감문국을 쳐서 감문군으로 삼았지만 아직 지방관을 파견할 만큼의 힘은 없었다.

10여년 후 어른이 된 부용(浮溶)은 감문군을 맡아 다스리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금효왕과 장부인의 능을 보수하고 힘을 길렀다.              

   절치부심의 날들을 보냈지만 강해만 가는 신라의 힘을 꺽기는 역부족이었다. 15여년의 세월동안 감문국을 다시 세우려고 노력하던  부용(浮溶)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감문국의 백성들은 그의 무덤을 양천리가 한 눈에 보이는 곳에 장사 지내고 임금에 준하는 무덤을 세우고 귀중한 물건들을 넣었다. 도굴을 막기 위해 큰 돌로 입구를 막았다.

                             영남일보 캡쳐

세월은 덧없이 천년을 흘러 후세의 사람들은 그 무덤을 장군의 무덤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해설)
양천리에는 장군의 무덤이라 불리는 오래된 석실고분이 있다. 향토연구가들은 그 무덤을 감문국 시대의 무덤이라 하고, 사학계에서는 신라시대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 공통적인 것은 감문 지배층의 무덤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1967년 발굴 당시 금제귀고리와 토기,화살통장식, 갑옷 등이 출토되었고 그 유물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개령면 양천리와 동부리 경계에 있는 민가에 1960년대 말까지 감문국 궁궐의 주춧돌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두 번이나 찾아 갔지만 그 돌은 없었다. 마당에 궁궐이 초석이 있다고 전해지던 집주인도 처음듣는 말이라 했다.

               동네주민 황인돈 씨(65세)

그  옆집의 주인에게서 자기집에 있던 오래된 돌 몇 개를 막걸리를 사려고 싼 값에 팔았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것이 수확의 다다.

          낙파(洛波) 류후조(柳厚祚)의 무덤

동네 주민에게서 대단한 무덤이 있다는 안내를 받아 가보니 감문국의 무덤은 아니고 ,낙파(洛波) 류후조(柳厚祚)의 무덤이었다. 그는 고종때 좌의정을 지낸 낙동대감이라는 별호를 가진 이다. 61세에 과거에 급제해 흥선대원군 석파(石破) 이하응에게 발탁되어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상주 출신인 그가 낙향하여 낙동강가에 살았다고 알고 있는데 그의  무덤이 개령에 있다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셈이다.

이명박 정부시절 대통령 비서실장과 통일부 장관을 지낸 류우익이 직계 후손이라 들은 기억이 있다.

            낙파(洛波) 류후조(柳厚祚)의 무덤에서 바라본 전주작

낙파 류후조 대감이 고향 상주를 버리고 김천의 개령에 무덤을 쓴 것이 우연이 아님을 무덤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무릎을 쳤다. 카메라가 좋다면 풍광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텐데 아쉽다.

바로 앞에는 감문국이야기나라가 만들어지고 있는 감문국의 궁궐터요 조금 뒤에는 감천이 흐르고 있다. 저 멀리는 금오산이 보이니 더 이상 明堂이 어디 있겠는가?

청빈하게 살았다더니 무덤은 옹골차게 잡았다.

그 아래 2,000여평의 땅에도 유명인이 살았다는데 석재의 부자재가 얼마나 대단한 재력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누가 살았는지 궁금하다.

기교한 무뉘의 돌이 아직도 가득하다. 많이 훔쳐갔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거주한 흔적으로 추정되는 비석도 보인다.

소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300살 이상은 될 것 같다. 이 정도면 김천의 보호수로 지정해야 할 듯하다. 천연기념물인 증산면 사무소의 소나무보다 더 나아 보인다.

오늘도 감문국의 주춧돌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 알리오?

길가에 보잘것 없이 나뒹구는 돌들이 궁궐에 쓰였던 돌의  흔적일지...

감문국의 땅에서 나온 못난 돌과 모래 한톨에는  모두 감문인의 숨결과  영혼이 스며있으니 궁궐의 주춧돌은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리라!

양천리의 담벼락에는 감문국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빗내농악과 서부리3층 석탑과 전사들은 그 벽화속에도 나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김천황악신문 #감문국의 슬픈노래

 

 

 

 

김서업 대표기자  hwangak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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