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用 강창우 (다물上古史硏究會 회장)

신정(新正)과 구정(舊正), 양력설과 음력설로 갈려져 있어도 고향으로 향하는 도로가 북적이는 날은 아무래도 음력설 전후다. 음력설 전후로 입춘(立春)과 우수(雨水)가 지나고, 다음에 오는 우리네 명절은 정월대보름이다. 어릴 때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일들을 기록해두고 싶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커다란 밥상 위에 오곡찰밥과 묵은 나물로 만든 여러 가지의 나물반찬을 마련해두고, 하루 종일 먹고 싶을 때마다 먹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특히 고기로는 구운 청어가 있었고, 자주 먹을수록 좋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때 먹었던 청어에는 가시가 많았고, 알이 많 입안에서 톡톡 터지면서 고소했던 기억이 있다.

피부에 나는 부스럼을 없앤다고, 생밤, 호두, 땅콩 등을 깨물면서 부럼깨기도 하였고,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라!’하고 더위팔기를 하면서, 다가오는 여름철에 시원하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바람이 좋으면 연을 날렸고, 젖은 가마니 위에서 윷놀이도 하였고, 어른들은 귀밝이술을 드시는 것을 보았다.

초저녁 보름달이 뜨면 식구들 모두 옥상에 올라가 자리를 깔고 절을 하고, 손을 모아 한해의 소원을 빌었다. 깡통에 군데군데 구멍을 뚫고 마른 나뭇가지를 담고, 끈을 길게 달아 불을 붙여 돌리면서 쥐불놀이를 해 본 적이 있다. 감천 냇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나뭇가지를 높이 쌓고 불을 붙이고 달집태우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친지나 식구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리 위를 몇 번 오가기도 하였고, 안택(安宅) 풍물패들이 집에 들러 한바탕 풍물놀이를 하면 약간의 수고비를 드렸다. 한편으로 논밭에서는 논두렁, 밭두렁을 태우는 연기가 논밭에 가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님은 점집에 들러 일 년 운세를 알아보고, 식구들에게 일 년 동안 주의할 점을 일러주기도 하였다.

물론 지역마다 색다른 나름의 민속 문화가 있고, 이를 지키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지만 시절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가보다. 우리 민속 문화의 대부분은 공동체의식을 강조하는 농경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고, 농경문화의 쇠퇴와 함께 공동체의식마저 약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불(火)에 관련된 놀이는 화재(火災)를 염려하여 금지되었고, 안택 풍물은 오히려 민폐가 되었다. 명절 차례를 통한 조상숭배 의식(儀式)들은 대부분 축소되거나 가족 단위의 행사로 간소화되고 있다. 노인들만 남은 촌락에서 젊은이들을 필요로 하는 문화행사는 간략하고 형식적인 동네잔치로 변하거나 사라져버렸다.

보일러가 등장하면서 온돌문화가 사라지고, 이제 겨울밤 방안 윗목에 놓아둔 물사발이 얼어터지는 일도 없어졌다. 그리고 한 겨울철 문고리에 젖은 손이 쩍 달라붙는 일도 사라졌다. 여름철 더위는 선풍기와 에어컨으로 해결되고, 부스럼과 버짐은 보기 어렵다. 독특한 민속 먹거리는 오히려 건강식으로 바뀌었고, 온돌과 흙집과 삼베옷 등도 건강을 위한 배려로 변했다.

옛 민속들은 잊혀져가지만, 자라나는 청소년 세대들은 급변하는 의식주에 적응하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차원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식구래야 몇 안 되지만, 올해도 옆지기는 조금이나마 보름 음식을 마련하려나보다. 채소류 말린 것과 부럼깨기를 위한 강정과 견과류들을 사두었고, 생선과 잡곡 찰밥 등을 마련하려고 한다.

은근히 당시(唐詩) 한 구절과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생각난다. 싯귀가 너무 좋아 목숨을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연연세세화상사(年年歲歲花常似) 해마다 피는 꽃은 늘 비슷하지만

세세년년인부동(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아니하구나

세태는 변해도... 올해 정월대보름에도 ‘쟁반같이 둥근 달’은 뜨겠지... 가는 겨울과 오는 봄을 어찌 잡고, 어찌 막으랴...모든 분들의 가슴에 훤한 대보름달이 뜨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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