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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 청백리의 표상, 이약동 선생이 배향된 양천 하로서원(賀老書院)김천의 문화와 유산을 찾아서 16)
  • 김서업 대표기자
  • 승인 2020.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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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양천동 하로서원에서  제3회 노촌 이약동 청백리상 시상식이 열렸다.

김천인들도 노촌 이약동 선생과 하로서원을  잘 모른다 . 하로서원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양천에서 샛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오른쪽에 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100미터 전방에 바로 하로서원이다. 주차도 편하다.

노촌 이약동선생은 1416년(태종16년) 현재의 김천시 양천동 하로마을에서 해남 현령을 역임한 벽진이씨 이덕손(李德孫)과 고흥 유씨 사이에서 태어나 자를 춘보(春甫), 호를 노촌(老村)이라 했다.

어릴 때 이름은 약동(藥童)이라 했는데 이는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한 모친이 금오산 약사암(藥師庵)에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소년기에 개령현감을 역임한 영남의 대학자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문하생으로 수학했고 강호의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봉계 출산 매계(梅溪) 조위(曺偉) 등과 교류했다.

26세 되던 해인 1442년(세종24) 진사시에 합격하고,선산.안동 등지의 향교 교수를 지내다 1451년(문종1) 증광문과에 급제한 이래 사헌부감찰(39세), 성균관직장(43세), 청도군수(44세), 선전관(49세), 구성부사(51세), 제주 목사(55세), 경상좌도 수군절도사(59세), 사간원대사간(62세), 경주부윤(63세), 오위도총부 부총관(66세), 호조 참판(68세), 전라도 관찰사(71세), 이조참판(72세), 개성 유수(74세), 지중추부사(75세)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 주요관직을 두루 거쳤다.

노촌 이약동은 지방관으로 가는 곳마다 칭송이 따랐는데 특히 제주도의 일화가 유명하다.

1470년 (성종1년) 제주 목사로 부임한 직후 매년 2월에 열리는 한라산 백록담에서의 산신제로 인해 백성들이 동사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제단을 산 아래로 옮기게 한 일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다.

제주도를 떠날 때 관에서 받은 모든 물품을 관아에 남겨두고 말을 타고 나섰는데 성문에 이르러 비로소 손에 쥐고 있는 채찍이 관물인 것을 알고 문 위에 걸어 놓았는데 세월이 오래됨에 채찍이 썩어 떨어지자 백성들이 바위에 그 채찍 모양을 새겨두고 기억하였는데 이를 괘편암(掛鞭岩)이라 한다. 탐라지와 야사에서 전하고 있다. 500년이 지난 지금도 제주도의 노인들에게서 구전되고 있다.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돌아오는 중에 광풍과 파도가 일어 파선의 위기에 이르자 그는 “나는 이 섬에 와서 하나도 사리사욕을 취한 것이 없다. 우리 중에 누군가 부정을 하여 신명이 노한 것이 아닌가? 섬의 물건을 취한 것이 있다며 내놓으라고 하자, 한 군졸이 행차가 떠나려 할 때 섬사람 하나가 갑옷 한 벌을 바치면서 바다를 건넌 후에 사또께 올려 정성을 표해 달라고 해 숨겨왔다고 하자, 받은 갑옷을 바다에 던져 풍랑을 잠재웠다는 투갑연(投鉀淵) 일화도 유명하다.

​1491년 (성종 22년) 76세의 나이로 치사하고,김천 하로촌에 물러나 살다가 1493년 (성종24년)일흔 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성종은 관리를 보내 제사를 내렸고 조정에서는 평정(平靖)이란 시호를 내렸다.

하로서원(賀老書院)은 벽진이씨 집성촌인 김천시 양천동 829번지 하로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을 배향하기 위해 1984년 노촌당(老村堂) 옆에 청백사(淸白祠)를 건립하면서 하로서원으로 개창했다.

현재 남아있는 김천의 서원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되어 있다.

하로서원의 근원은 1648년(인조26) 김천시 감천면 금송리 원동마을 입구에 세워진 경렴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김종직(金宗直), 조위(曺偉), 이약동 등 3인을 제향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훼손된 후 서원복원을 위해 오랫동안 논의를 해왔으나 배향된 후손끼리 끝내 의견이 맞지 않아 양천동 하로 마을 벽진이씨 문중에서 1983년 하로 마을 노촌당 옆에 이약동의 위폐를 봉안한 청백사를 준공한 후 하로서원이라 이름했다.

서원터는 이약동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학문을 논하며 강학하던 유허지로서 1845년 노촌당, 1981년 동·서재 건립과 함께 생가터에 있던 유허비를 옮겼고 1983년 사당 청백사를 건립되면서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서당으로 운영됐고 양천초등학교가 개교되기 전인 1940년대 말에는 임시 초등학교로 사용되기도 했다.

서원 내 청백사는 훗날 김종직, 조위와 함께 이약동의 위패를 봉안한 경렴서원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후 오랫동안 서원복원 운동이 전개되던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1983년 벽진이씨 문중에서 이약동의 위패만을 모신 청백사를 선생의 출생지인 양천동 하로 마을 노촌당 옆에 세웠다.

내부 건물로는 하로서원 기숙사인 동재인 염수료가 있다. 1981년 구성면 양각리 모산마을에 있던 재실을 이전해 건립했다.

하로서원 기숙사인 서재 필요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퇴집 팔작지붕으로 1981년 동재와 함께 건립됐다.

강당인 노촌당과 사당인 청백사 사이에 있는 유허비는 양천동 하리 199번지 노촌선생의 생가 터에 1846년(헌종 12년) 세워졌던 것을 198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비각을 세웠다.

평정공 노촌 이약동 선생이 76세에 하로 마을로 낙향할 때 초가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였다. 그는 가난을 자랑으로 여기며 후손들에게 시(詩)한수를 남겨 교훈으로 삼게 했다.

‘내 살림 가난하여 나누어 전할 것이 없고

오직 있는 것은 바구니 표주박과 낡은 질그릇 뿐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

차라리 청백을 너희에게 당부하는 것만 못하리

육당 최남선은 이약동을 우리나라 역사 이래 최고의 청렴결백한 관리로 꼽았고, 이약동의 일화는 정약용선생의 <목민심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청렴한 관리의 표상으로 전해졌다.

벽진이씨 평정공파 19대 종손인 이병권 김천문화원 이사는 “1년에 하로서원을 찾는 전국의 공직자들이 3,000여명에 이른다. 폐교된 양천초등학교를 청백리 교육원으로 만들어 전국의 공무원들과 공공기관의 직원들을 교육시키 는 명소로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命理學을 공부하다 보면 官(명예)와 財(재물)을 택하는 운명이 다르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재생관이라 해서 선거직에서는 돈이 명예를 창출하기도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명예를 먹고사는 운명을 가진 이는 재물이 없는 것이 淸하다.

명예를 추구해야 할 사람이 재물을 탐하면 그가 갈 곳은 오직 하나 국립호텔이다. 반부패와 청렴의 시대에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최고의 淸白吏가 김천인이다.

자랑스럽지 않은가?

 

#김천황악신문 #노촌 이약동#하로서원

 

 

 

김서업 대표기자  hwangak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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