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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체(假傳體) 문학의 고향 아포읍 대신리 함골김천의 문화와 유산을 찾아서 15)
  • 김서업 대표기자
  • 승인 2020.06.2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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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林椿)의 “국순전,공방전”의 향취가 짙게 배인 역사의 현장”

함골은 조선 말엽 개령군 동면에 속해 있었으며 개령초등학교 뒷산은 굶주린 호랑이가 개를 잡아 먹으려고 움추린 형상이며, 현재의 대신 2동 앞산은 개가 앉아 있는 형상인데, 개를 잡아 먹으려는 범을 잡기 위하여 함정을 파놓았다 하여 이 마을을 함골이라고 불렀다. 그 후에 현재의 대신 1동을 대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학창시절 국문학 시간에 가전체 문학이란 것을 배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식물이나 동물을 의인화해서 그 일대기를 사전(史傳)의 형식에 맞추어 허구적으로 만들어 전하는 문학 양식으로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산문 문학이다. 사물을 의인화해 전기(傳記) 형식으로 서술하는 문학 양식으로 고려 중기 이후에 성행했다. 그 가전체 문학을 대표하는 것이 임춘의 국순전과 공방전이다.

바로 그 국순전과 공방전의 작가 임춘의 삶이 짙게 배인 곳이 함골이다.

‘국순전’은 술을 의인화한 작품으로, 현존하는 가전체 문학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술의 내력을 밝히고, 개인, 왕, 국가가 술로 인해 향락에 빠지는 양상을 보여 줌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씌어졌다.

‘공방전’은 돈(엽전)을 의인화하여 그 내력과 행적을 허구적으로 구성한 가전으로, 돈의 폐단을 비판하고 재물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경계한 작품이다.

임춘은 예천 임씨(醴泉林氏)의 시조로 호는 서하(西河)다.

고려 건국공신의 후예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할아버지 임중간(林仲幹)과 상서(尙書)를 지낸 아버지 임광비(林光庇)와 큰아버지 임종비(林宗庇)는 벼슬이 한림원학사 이르렀다. 7세에 육갑(六甲)을 외고 경서를 통달했다는 자신의 기록으로 보아 신동이고 임종비의 문학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이인로 열전에 임춘에 관한 기록이 짧게 덧붙여져 있는데 그의 자(字)는 기지(耆之)이며 서하(西河) 사람이었다. 글재주가 천하에 떨쳤으나 정작 과거 시험에는 연거푸 낙방하였고, 어렵게 살다가 일찍 죽었다고 적혀있다.

무신정변이 터진 뒤에도 임춘은 5년 동안 개경에 머물러 살았다. 온 집안이 화를 입었지만 겨우 살아남아 힘겹게 버텼으나, 결국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무신정변에 이어 ‘김보당(金甫當)의 난’까지 터지며 문신에 대한 핍박이 더욱 심해지자 어쩔 수 없었던 듯하다. 당시의 삶에 대해 임춘은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난리를 만나 앞으로 밟히고 뒤로 넘어지며 숨어 지내며 남에게 몸을 던져 구원을 바란 것이 여러 번이었지만, 모두 저를 개돼지처럼 대하며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에 산 것이 모두 5년이었으나 굶주림과 추위는 더욱 심해졌고 가까운 친척들도 문에 들여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에 가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갔습니다.”

여러 해 동안 지방을 떠돌았지만, 타향에서의 삶도 쉽지 않았다. 상주(尙州)에 머물 때 그는 관의 구휼을 받고 서기(書記)에게 감사하는 글을 올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침에 저녁거리를 계획하지 못하고, 구차하고 빈한하여 동리 사람들이 속으로 웃으며 서로 멸시하고 친구들도 모두 등지고 절교하고 있으니, 이렇게 되는 것도 또한 운명이라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한단 말입니까? 어찌 장자(長者)의 인(仁)을 베푸시와 굽어 천한 동문(同門)을 기억하실 줄을 바라겠습니까.”

결국 임춘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집도 타버리고 대대로 내려오던 전토(田土)도 남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살길이 막막했던 임춘은 절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무신정변 이후에도 임춘은 과거에 응시를 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곤궁한 생활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실의한 임춘은 은거 생활에 들어갔고, 얼마 뒤 장단(長湍)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극도로 빈한한 처지에서 다른 문인들과 더불어 죽림고회(竹林高會)를 결성하여 술과 시로 사회적 울분을 달랬다.

강좌칠현은 고려 후기 일곱 선비가 서로 의를 맺어 망년지우(忘年之友)를 삼고 시와 술을 즐겼는데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를 가리킨다. 중국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과 비교해 일컬어진 명칭이다.

김천시사(1권 ,133P)에는 임춘이 1147-1197(50살)년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문헌을 참고하면 의종 무렵에 태어나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학계의 추측이 있고, 최근에는 40세에 귀밑털이 희다고 하는(四十龍鍾)이라는 말로 40세까지 추정하는 설이 있다. 그의 삶은 연구가 더 필요하다.

임춘은 유교적 교양과 문학으로 이미 무신란 이전에 상당한 명성을 얻었고, 20세 전후에 무신란을 만나 가문 전체가 화를 입었으나 그는 겨우 피신해 목숨은 부지하였다. 그러나 조상 대대의 공음전(功蔭田 ; 고려 시대에, 공신과 오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공을 따져 지급하던 토지)까지 탈취당하였다.

약 7년여의 타향살이를 했는데 그 때 함골에 은거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인로가 함골로 찾아와 술을 권하자 감사의 뜻으로 시를 쓰기도 했다.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벼슬을 구하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 다시 개경으로 올라와 과거준비까지 한 적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의와 빈곤 속에 방황하다가 일찍 죽고 말았다.

이인로(李仁老)를 비롯한 죽림고회(竹林高會) 벗들과는 시와 술로 서로 즐기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탄식을 하면서도 자신의 큰 포부를 문학을 통하여 나타냈다.

임춘의 시는 강한 산문성을 띠고 있으며 자신의 현실적 관심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투철한 자아인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상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춘은 예천의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다.

문집인 『서하선생집』은 그가 죽은 뒤 지우(知友) 이인로에 의하여 엮어진 유고집으로 6권으로 편찬되었다. 『동문선』·『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여러 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임춘의 문장에 대해 이인로는 “선생의 문장은 고문을 배웠고 시는 소아(騷雅)의 풍골이 있어서 해동에서 벼슬하지 않은 사람으로 뛰어난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그가 죽은 지 20년,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 시를 읊으면서 마음으로 흠모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무신정권 아래 벼슬 한 자리 하지 못한 채 평생 불우하게 살다 간 서하 임춘, 그의 사상과 문학의  고향이자 향기가 짙게 배인  곳이 바로 우리 김천의  함골이다.

임춘의 삶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가전체문학이 함골에서 탄생했는지 그가 함골에서 어떤 삶을 살았고 은거지는 어디였는지 여기에서 卒했는지도 몹시 궁금하다.

비 내리는 날 임춘의 시 한 수 읊으며 불우했지만 뜨거웠던 고려시대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 사내의 삶을 기린다.

贈演之(연지에게 주다)-임춘(林椿)


風生虛閣抵千金(풍생허각저천금)

허전한 누대에 이는 바람 천금의 값어치


滿院荒凉碧樹深(만원황량벽수심)

정원에 황량함 가득하나 푸른 나무 깊다.


不覺天西殘月落(불각천서잔월락)

하늘 서쪽 쇠잔한 달 지는 줄 모르고

 

終宵空伴草蟲吟(종소공반초충음)

밤새도록 풀벌레와 함께 벗 삼아 읊다.

 

#김천황악신문 #임춘

김서업 대표기자  hwangak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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