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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지(河緯地)가 지은 권농교서(勸農敎書)란 목판본 책을 찾았다
  • 김천황악신문
  • 승인 2017.09.0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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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택용/선산학연구소장

1444년(세종 26) 7월 25일에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는 세종대왕의 명을 받들어 농사를 장려하는 권농교서(勸農敎書)를 지어 올려서 반포하도록 하였다.

즉 내가 생각하건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농사라는 것은 의식의 근원으로 국정에 있어 무엇보다 먼저 하여야 할 것이다. 오직 그것이 백성의 목숨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를 겪게 되는 것이니, 윗사람이 성심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백성으로 하여금 부지런히 농사에 힘써서 생동감 있는 즐거움을 이루게 하겠는가. 지금의 수령들은 묵은 습관에 젖어서 비록 파종할 시기를 당하더라도 망종이 아직 멀었다고 하면서, 전답의 소송(訴訟)에 관한 것을 바로 처결하지 않으며, 곡식 종자를 꾸어주고 식구의 양식을 진휼하는 것도 항상 서두르지 않고, 항상 느리게 하여 제때를 잃게 한다. 비록 급히 서둔다 해도 수령은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호조에 공문을 내어 정부에 보고하고, 정부는 사유를 갖추어 위에 아뢰어, 서로 왕복하는 동안에 망종(芒種)이 지나버리는 일도 있다. 혹은 갈고 심는 적기를 알지 못하고 한갓 권과(勸課)하는 명목만 힘써서 파종하는 것을 너무 일찍 독려하기 때문에 싹이 살지 못하여 도리어 농사를 망치게 하는 일도 있다. 혹은 참으로 절기의 이르고 늦음을 알지 못하여 계획이 소홀하여 사기(事機)를 잃는 경우도 또한 있다. 이것이 어찌 근심을 나누고 백성을 사랑하는 본의라 하겠는가?’ 라고 썼다.

필자는 조선왕조실록과 동문선(東文選)에서 기록된 글을 보았으나 목판본(木板本) 책이 있는 줄은 몰랐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권농교(勸農敎)란 책이 있다. 표제는 안평서(安平書)이며 판심에는 권농교이고, 책 말미에는 안평대군서(安平大君書)로 되어있다. 이 책은 세종대왕의 3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李瑢)의 친필을 후대에 목판에 새겨 간행한 교서로서 책의 표제 이면에는 1586년(선조 19) 여름에 황해도도사 이사정(李士正)이 당시 관찰사 임연재(臨淵齋) 배삼익(裵三益)에게 증여한 책(萬曆十四年夏海西都事李士正所贈臨淵齋書)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므로 간행한 시기를 1586년(선조 19)으로 기록하였다.

또, 이 책은 하위지가 지은 명문장과 세조가 집권하면서 반역 죄인이 되어 작품도 거의 일어버린 당대의 명필 안평대군이 친히 쓴 글씨를 바탕으로 목판에 새겨 간행한 것으로 안평대군의 필운을 볼 수 있는 귀한 책이다. 세종대왕은 일찍이 구미출신 정초(鄭招) 등으로 하여금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저술하게 하여 백성들의 농사지침으로 삼게 하였으며, 후에 다시 권농교서를 내려 농업을 장려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교서도 구미출신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가 초고를 작성한 것이다.

하위지는 1455년(세조 1) 예조참의로 재직 중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예조참판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세조의 녹을 먹는 것을 수치로 여겨 그해부터의 봉록은 취하지 않고 별실에 쌓아두었다. 세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서사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자 주제(周制)를 들어 서사제의 부활을 주장했다. 이에 세조는 그의 관(冠)을 벗기고 장(杖)을 쳤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해인 1456년(세조 2)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등과 함께 비밀리에 단종복위를 추진하여 명나라의 사신을 위해 베푸는 연회에서 세조와 측근관료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에 차질이 생겨 거사가 연기되자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礩)이 세조에게 이 사실을 알려 복위운동이 탄로 나고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당당한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거열형을 당했다.

남효온은 추강집(秋江集)에서 그의 인품에 대해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길바닥에 물이 고였더라도 그것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가지 않았다.’ 라고 평했다.

1691년(숙종 17) 신원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서울 노량진 민절서원, 경북 구미 월암서원, 충남 홍성 노운서원, 충남 연산 충곡서원, 경북 의성 충렬사 등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단계선생은 구미의 장원방(壯元坊)이라 부르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장원방은 조선조에 문과에 장원급제자 7명, 부장원 2명을 포함하여 15명이 급제한 곳이다. 근간에 구미시에서는 인재향(人才鄕)으로 부르는 장원방을 조명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어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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