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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국민 저항권(抵抗權)을 인정했다
  • 김천황악신문
  • 승인 2017.08.1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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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택용/경북도문화융성위원회 위원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우리나라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 ‧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그의 생애는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한다.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이가환(李家煥)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李瀷)의 학문을 접했다.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 등의 저서를 탐독했다.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사헌부 지평 등을 지내고,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승정원 동부승지 등이 되었으나, 주문모사건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소환되어 승정원 좌부승지, 형조 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후기는 주로 유배생활의 시기이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등과 그리고 형인 정약전(丁若銓)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다산이 18년의 유배형에 처해지기 전인 1797년(정조 21) 36세 때 특명으로, 황해도 곡산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이계심 사건(李啓心事件)’을 처리하였다. 이계심이라는 사람은 곡산의 백성으로, 이전 부사(府使)가 다스릴 때 아전이 농간을 부려 포보포(砲保布) 40자의 대금으로 돈 200냥을 걷어야 하나, 돈 900냥을 대신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이 시끄럽게 일어났다. 이에 이계심이 우두머리가 되어 농민 1000명을 모아 관청에 들어와 호소했는데. 그들의 말이 공손하지 못해 관청에서 형벌을 내리고자 하니, 1000명이 한꺼번에 무릎을 걷어붙이고 이계심을 둘러싸 대신 매 맞기를 청해, 형벌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전과 관노들이 각자 곤장을 들고 뜰에 모여 있던 백성들을 마구 치니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는데 이계심도 탈출하여 도망가 숨어 부사가 감사에게 보고하고 오영(五營)에 명령을 내려 염탐해 붙잡게 했으나, 백성들이 숨겨주어 끝내 잡지 못했는데, 그러한 말이 한양에 와전되길 ‘곡산의 백성들이 들것에다 부사를 담아 객사 앞에 버렸다.’ 고 하였다. 이에 다산이 부임을 위한 하직인사 다닐 때 정승 김이소(金履素)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주동자 몇 놈을 죽이라고 권하고, 채제공(蔡濟恭)은 더욱 기강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다산이 곡산 땅에 들어서니 호소문을 들고 길을 막는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냐고 물어보니 그가 바로 이계심이었다. 곧바로 이계심에게 뒤따라오도록 했더니 아전이 말하길 ‘이계심은 오영에 체포령이 내려진 죄인으로 법에 따라 붉은 포승으로 결박하고 칼을 씌워 뒤따르게 함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라고 했으니 다산이 물리쳤다. 관아에 오른 뒤에 이계심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말하기를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 라면서 마침내 불문에 부쳤다. 이에 백성들의 원통함이 펴지고 화락해졌다.

한 고을의 부사 곧 목민관은 입법 ‧ 사법 ‧ 행정의 삼권을 쥔 막강한 권력자로 상당한 권한을 지녔다 할 수 있는데, 다산은 목민관으로서 공렴(公廉)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판결의 이유가 자신이 당할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 않고, 백성이 당하는 폐해를 들어 관에 항의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관이 밝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재판은 공정해야 한다는 그의 의지의 발로인 판결이었다. 다산 같은 목민관을 만나는 행운을 가졌던 이계심은 목숨을 건졌다.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에도 관리란 모름지기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다산의 판결문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시대에 ‘국민저항권’을 인정하는 다산의 백성을 사랑한 것에 가슴이 뭉클하다. 다산은 국민 저항권을 통째로 인정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현 세태에도 이러한 자연법사상의 천부인권인 저항권이 폭 넓게 인정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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